옆집
난중일기 036 (20231127~20231203) 본문
2023.11.27. 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새벽에 여러 번 깼다. 집이랑 안 맞는 건지 어떻게 여행 가면 거기서 더 잘 자는지 모르겠다. 잠을 여러 번 깨면 꿈도 여러 개 꾼다. 오늘은 드디어 꿈에 안 나왔구나, 새벽에 깨어 이렇게 안심하고 잠들면 어김없이 다음 꿈에 나온다. 이제는 정말 무뎌졌지만 간간이 생각나며 속상하다. 나는 아직도 다 못 잊었구나, 하고.
친구랑 노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혼란스러워졌다. 아무것도 착실하게 준비해둔 게 없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뚜렷하게 모르고. 다시 한 번 정리해 봐야지. 이 고민을 시작한 게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순간적인 이벤트에 감정에 휩쓸려 정신 나가고, 도수치료같이 기본적인 것도 안 받으러 다니고.
계약 이전 문제로 리스 회사에 얼굴 비추러 다녀왔다. 굳이 날 직접 봐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가 우리 팀원들이 말실수 한 것 때문에 날 부른 것임을 알았다. 미팅 시작부터 당황했지만 실수한 팀원들한테 화가 나진 않았다. 애초에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아픈 동안 날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본인들 선에서 알아서 하려 했겠지. 생각도 못한 대화라 여느 압박 면접보다 살벌한 미팅이었다. 순간을 모면하고 나와 회사 가는 길 내내 생각했다. 내가 메일만 꼼꼼히 읽었어도. 내가 조금만 덜 아팠어도. 조금만 더 일찍 정신차렸어도.
회사로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나 화 안 났다고 세 번쯤 말했을 때, 더 강조하면 오히려 화가 났다는 뜻 같아 그만 두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미팅을 하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기적, 강제적인 건 무엇도 정말 싫다.
퇴근하고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데 몹시 추웠다. 영하 1도였다. 코트를 벗고 운전대를 잡으니 이가 딱딱 마주치게 추웠다. 집에 와서 대충 밥을 해서 먹고 8시부터 누웠다. 오늘따라 조용한 윗집이 다시 시끄러울까봐 두 시간을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잠들었다.
2023.11.28. 화요일
부다페스트, 비
자정에 엄청나게 무서운 꿈을 꾸고 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며 깼다. 카톡에 너무 무섭다고 쓰다가 잠들었다. 새벽 네 시에 깼을 때 아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뒤이어 일곱 시까지 잤다. 샤워하기 전에 아주 오랜만에 명상을 했다. 앉을 힘이 없어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회사 오는 길에 비가 꽤 내렸다. 어젯밤엔 영하 1도에 하늘도 흐리기에 눈을 조금 기대했는데 진눈깨비도 아니고 그냥 빗방울이 내렸다. 창가에 서서 한참 구경했다. 독일은 눈이 많이 와서 이사님이 출근도 못하고 계신댄다. 얼마나 추울지 상상이 안 된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어김없이 비염이 찾아왔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코가 조금 막히고 재채기만 몇 번 하는 정도이다. 얼마 전 주문한 아크네 풀오버가 왔다. 사이즈 미스다. 생각보다 많이 얇고 크고 긴데 그냥 입어야지. 점심에는 크리스마스 연휴 때 지낼 베르가모 숙소를 찾아 보았다. 오래 머무니까 부엌도 있고 거실/침실 분리된 곳이면 좋을 것 같아 아파트먼트로 예약했다.
오후에는 어제 얘기한 주간 미팅을 했다. 익숙하고 편한 상대인데도 그냥 회의 자체로 기가 빨렸다. 말을 많이 해서 더욱.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거 너무 너무... 너무.. 힘들다.
월 마감 프로세스를 재정비하고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대충 끝내고 나니 8시 30분이 되었다. 원래는 공부도 하고, 여행 계획도 하려고 했는데 더 뭘 할 체력이 아니었다. 일찍 누웠는데 윗집이 시끄러워서 1시 넘어 잠들었다.
2023.11.29.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전날 비가 와서 공기가 많이 찬데 9시부터 햇빛이 또 모니터가 안 보일 정도로 심하게 비친다. 제발 그만.
한국 가서 치려던 토익을 전날 취소했으니, 나는 영어 점수가 없다. 영어 더 까먹기 전에 아이엘츠나 치려고 찾아 봤는데 토익 900점 수준이 6.5점에 그친다는 정보를 보고 멈칫했다. 공부 안 하고 보려고 했는데. 근데 공부한다고 단기간에 오를 점수인가 싶기도 하고. 토익 공부도 한 번 안 해봤기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솔직히 열심히 보지도 않을 책에 돈 쓰기 싫다. 학원이랑 출판사에 기부하는 게 한두번이어야지요..
점심에는 테스코 갔다가 놀라고 힘들어서 그냥 밥을 다 버리고 일어났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먹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꽃을 샀다. 기분이 좀 좋아질 수 있을까 싶어서.
며칠 동안 쫌쫌따리로 모은 영주권 정보를 포스팅에 정리하고 전표 처리도 몇 개 하고 나니 8시가 되었다. 사무실이 집보다 훨씬 조용하고 뭘 하기가 좋아서, 공부하다가 갈까 싶어도 딱 저렇게 일 마치고 나면 머리가 거부한다. 리들에 가서 삼겹살, 물 한 병, SAUSKA 와인을 샀다.
와인을 사니까 직원이 신분증 검사를 하자는데 하필 지갑을 두고 온 것이다. 아임 떠리 XX... 하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나를 가만히 보던 직원이 웃으면서 가라고 하는데 조금 웃기고 슬펐다.
1구 인덕션을 갖다 버리든가 해야지 따뜻하게 뭘 굽거나 끓이면서 TV 보니까 돼지의 극락이 따로 없다.
2023.11.30. 목요일
부다페스트, 첫눈!
아침부터 눈 관련된 음악이 듣고 싶더니 출근한 지 30분만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신입이 말 안 해 주었으면 모를 뻔 했다. 올해 첫눈이다. 작년에 이렇게 눈을 본 적이 있었나? 처음에는 테라스 나가서 밟아보기도 하고, 부사장님 방 창문 두들기며 눈 온다고 좋아했는데. 두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양으로 내리는 걸 보니.... 질렸다. 뭐든 중간이 없는 극단적인 헝가리. 오늘 원데이 클래스 들으러 가는 날인데.
24s에서 블프 세일을 하길래 딱 300유로만 질렀다. 공부를 하든 가게를 하든 영주권을 따든 뭘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자꾸 돈 쓰는 게 이제 달갑지 않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한 몇 개월 전에 긴축재정한다고 나댄 것처럼 극단적으로 그러고 싶지 않다. 아... 내가 이렇게 극단적이어서 헝가리처럼 극단적인 나라에 왔는가.
퇴근 전 회사에서 일이 있었다. 괜찮다 싶으면 일이 터진다. 하루이틀도 아닌데 난 왜 아직도 이따위 자잘한 해프닝에 열불내고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른대로 연말까지 회사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 건강하지 않은데 내가 너무 무리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직원들 퇴근 시키고 한참 울었다. 그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었다.
며칠 전만 해도 괜찮고 밝아졌던 나는 분명히 오늘의 내가 가서 엉망진창일지언정 그림도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어색해도 맘 편하게 있길 바랐을 것이다. 나는 나랑 한 약속 깨는 게 질린다. 가지도 않을 수업, 입지도 않을 옷, 공부하지도 않을 책, 먹지도 않을 식재료 사는 것도 질린다. 그리고 이 마음의 병도 질린다. 그래서 그냥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왕 박차고 나온 거 그냥 가자고 꾸역꾸역 걷는데 후회됐다. 길이 얼어서 몇 번이나 넘어질뻔 했다. 눈에 푹푹 빠져 발이 다 젖었다.
미술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좋아하던 사람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만 파악하고 나서 수업을 들었다. 그럴 수 있는 내 마음이 닳고 닳아 보였다.
수업 자체는 평화롭고 좋았다. 나중엔 집중력이 떨어지며 힘들었고, 완성한 그림 꼴이 별로라 뿌듯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 시간, 어쩌면 최근 들어 제일 큰 위기였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다른 데 집중해서 보낸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사무실에 그림을 갖다 두었다. 아무리 봐도 허접하지만 오늘은 기념하고 싶었다. 두 시간에 걸쳐 긴 답장을 썼다. 이것으로 제발 내 길고 찌질한 상사병이 끝나기를. 전송을 누르니 신기하게도 딱 00:00. 자정이었다.
드디어 12월이다.
2023.12.01. 금요일
부다페스트, 비
아침에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윗집은 9시 넘어서야 일어나는지 그때부터 시끄럽고 대형견 짖는 소리가 많이 난다.
눈물샘 고장이 어쩌고 하는 유치한 노래가사를 비웃었는데 비유가 아니라 진짜 고장이 날 수도 있나. 누가 수도꼭지 돌려 튼 것처럼 아무 생각을 안 해도,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눈물이 뒤로 넘어가 베개가 다 젖었다. 왜 우는지 살펴보고 싶지도 않다. 진짜. 그냥. 질린다. 친구랑 얘기해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일기를 쓰다 보니 눈물이 멈춰서 일어나 씻었다.
얼굴이 조금 붓고 씻은 얼굴이 말갛게 창백해서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다시 눕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택시를 불렀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집앞, 골목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멀쩡하다가도 뭔 놈의 눈물이 이딴 식으로 예고도 없고 이유도 없다. 이제 아프면 안 돼, 절대 안 돼, 다독이면서 사무실에 들어왔다. 이게 자기 격려인지 가스라이팅인지 가끔 헷갈린다.
어제 눈길에 다 젖었던 신발을 생각없이 그냥 신고 나와서 종일 찝찝하고 걸레 냄새가 났다. 아.....
급여 정산하는 날이라 엑셀을 보는데 간단한 파일인데도 눈에 안 들어왔다. 한 시간 정도 꾹 참고 뭐라도 하니 금방 불이 붙었다. 그때부터가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퀘스트 깨듯이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오늘도 나는 돈을 벌었고, 하루를 무사히 보낸 사람이 된다.
친구가 밥은 잘 먹고 있는 거냐고 묻기에 어제 기억이 잘 안 나다가, 컵라면 하나 먹고 24시간째 커피 말고 아무 것도 안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묻기 전에 배고픈 줄도 몰랐으니 마음의 힘과 마음의 병은 일상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걸까.
신입이 내가 그린 그림을 구경하더니 아~ 하고 차마 아무 칭찬도 안 했다. 당연하지 내가 봐도 개허접하니까. 빈말 안 하는 신입이 마음에 쏙 들고 이럴수록 신뢰도가 올라간다. 멀쩡한 척 농담이라도 해 주어야지 싶었는데 기운이 없었다. 빈츠 하나를 까먹었는데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내일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공연을 다녀오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일정이 한동안 없다. 3월에 한국 가는 게 다다. 12월에는 여행이 많고, 와인 수업도 있고, 내가 태어난 달이며, 내 제철이고, 다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눈이 반짝이거나 심장까지 반응이 오진 않는다. 당분간은 큰 자극 없는 채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대로가 다행일 것 같다. 조금 걱정인 건, 가족이나 친구들이랑 대화하는 것도 점점 버거워진다는 것. 뭐가 문제인지 파악조차 하기 싫다는 것.
그래도... 스무살 이후로 겪은 수없는 사건 사고에도 흔들린 적 없는 믿음. 세상은 결국 나의 편.
2023.12.02. 토요일
밀라노, 비 내리고 흐림
새벽 비행은 당분간 안 해야겠다. 너무 피곤하다.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주 오랜만에 배경이 회사나 이 동네가 아니었던 거 같다. 잠깐 본다고 틀었던 고려거란전쟁의 전개 속도가 미쳐서 멈출 수가 없었다. 6화까지 다 보고 나서야 잠들었는데 세 시간 자고 일어난 것이다. 공항 가는 길은 가뜩이나 가로등도 없어 어두운데 오늘은 안개까지 자욱했다.
비행기 이륙부터 착륙까지 내내 잤다. 비즈니스 탄 것도 아닌데 착륙이 아쉬운 건 처음이었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공연 본 것 하나로 이번 여행은 200% 만족한다.
2023.12.03.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오전에 커피라도 마시려고 조식 종료 시간 20분 전에 0층으로 내려갔다. 기계에서 내린 커피는 회사것보다 맛없었고 식빵은 느끼했다. 기억하자. 나는 조식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 제발 그만. 먹지도 않을 거 그만.
전날 사온 와인은 거의 마시지 않아 병목까지 남아있어 아침부터 두 잔을 마셨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누워있다가 나왔다.
어제 사소하게나마 살아야 있어야 할 이유를 느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잘한 게 하고 싶었다. 꿈에서도 나를 이렇게까지 오래 아프게 한 사람에게 말했다. 난 잘 살아야 하니까 제발, 제발 부탁이니 이젠 내 인생에서 나가달라고. 미용실도 가고싶고, 늘 엉덩이 사이즈에 맞춰 사야 하다보니 허리에서 흘러내리는 바지 때문에 벨트도 사고싶었다. 하지만 요즘 살이 빠지고 있어서 벨트는 몸무게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야겠고, 미용실은 런던이나 밀라노 다시 왔을 때 가도 된다.
밀라노 공항에 볼 거 많다며. 쉥겐 지역 출국장은 정말 뭐가 없다. 쇼핑이고 뭐고 할 게 하나도 없어서 잔치국수같은 라면,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사 마셨다.
집에 오니 꼴이 개판이라 청소를 조금 했다. 정말 최소한의 청소만. 식기세척기랑 세탁기가 일 다 해 주는데도 집어 넣는 것 자체가 오래 걸린다. 그래봤자 30분도 안 걸리는 것이 왜 이렇게 손이 안 가는지 모르겠다.
신입이 예전에 사다 준 생생우동 유통기한이 며칠 지나있었다. 원래같으면 하루 지나도 버리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끓여 먹으며 고려거란전쟁 두 편을 몰아보았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생겨서 다행이다. 적어도 다음 주까지 소소하게 기다릴 것이 생겼으니까.
일찍 누워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오고 가는 마음을 예측할 수도, 멈출 수도 없지만 재앙처럼 여기진 말자고. 나라는 그릇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 채워놓고 여유가 되면 나눠 주고, 받으면 채웠다가 감당이 안 되면 흘려보내기도 하는 거라고. 내가 꽉 차 있으면 잠깐 넘치고, 잠깐 덜어내도 흔들릴 이유가 없다.
하늘은 날씨가 맑고 흐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날씨같은 감정은 나를 망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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