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34 (20231114~20231120)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34 (20231114~20231120)

여해® 2023. 11. 21. 21:38
728x90
반응형

 
 
 
2023.11.14.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당분간 아무 일정이 없는 줄 알았는데 캘린더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 no-show나 긴급 취소로 피해를 주지 않게 아웃룩 캘린더에 다 정리를 했다. 당장 오늘은 상담 세션이 있고, 내일은 양조장집 막내딸이 큐레이터로 있는 갤러리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고, 모레는 회사 앞 마사지사와 예약이 있다. 특히 마사지는 지난 번에 전날 취소해서 너무 미안했는데 이번엔 꼭 가야겠다. 
 
배터리는 물론이요 이젠 스피커까지 지직거리는 핸드폰 때문에 더는 견딜 수가 없기도 하고, 에르메스에 목걸이 관련 물어보러도 가야하고, 클림트의 그림, 레오폴트 무세움 작품도 다시 보고 싶어서 환불 불가한 비엔나행 기차 티켓을 끊었다. 마침 내일 돈도 들어오겠다 핸드폰은 꼭 바꿔야겠다. 저번에 언니랑 같이 먹었던 갈비탕 비슷한 수프도 다시 먹고 싶고, 자허도 다시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
 
내친 김에 12월 말에는 프랑스 요리 수업도 예약해 놨다. 12월엔 정신없이 바쁘겠다. 참, 친구는 비행기 값이 너무 높아 헝가리에 못 오겠다고 하였다. 아쉽지만 이해한다. 비행기 가격이 평소의 3배 가까이 된다. 나도 이런 상태로는 친구를 잘 챙겨줄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잘 모르겠지만, 목요일에는 겸사겸사 회사에 나갈까 싶다. 시기상조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 되는대로 놔둬보자.
 
상담은 생각보다 그냥 친구에게 털어놓는 일과 같았다. 돈을 냈으므로 죄책감 없이 더 떠들었다는 것이 좀 달랐다. 좋았다. 내 장황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라도 분석해 주겠지. 그 사람은 학자니까 나를 스터디해 주겠지. 내 고민과 내 이야기가 저 사람에겐 하나의 케이스가 되겠지. 그것 자체가 안심이 되는 느낌.
 
새벽까지 일했고 누워서는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했다. 저녁에 카톡으로 동생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아서. 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 10년 했으면 많이 했어. 그냥 이제 내려놔.
 
 
 
 
 
 
2023.11.15. 수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아침부터 달갑지 않은 연락이 연달아 와있어 그리 좋게 시작을 못했다. 계속 속도 안 좋고 국물도 먹고 싶어서 쌀국수를 시켰는데, 시킬 때는 쌀국수가 이 가격이라니 싶었지만 (거의 10,000 포린트) 포장과 음식 품질이 좋아서 납득이 되었다. 면이 불었나 양이 많아서 마지막엔 꾸역꾸역 먹었다. 점심 먹고는 시간이 남아 잠시 누워 있었다.
 
아주 간만에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꿈도 아주 구체적인 것을 꾸었다. 5일이 토요일인줄 알고 급여 이체를 안 했는데, 사실 금요일이었고, 나는 이미 노트북을 회사에 두고 가족 여행을 와있는 그런 아주 현실적인 꿈.
 
이쪽 일 하면서 중요한 결제를 제때 못한 적이 한 번 있다. 신입도 아니었고 그래서 더 창피했다. 여러모로 정신 팔려 있었던 때고, 가산세 천원만 나와도 이게 뭐냐고 묻는 회사에 가산세가 주말 사이 300만원이 붙어 내 월급이라도 바쳐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었다. 나의 상사는 아무 이유도 묻지 않았고, CFO에게 내야 하는 경위서도 면제됐다.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도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때 크게 충격을 받았다. 나도 괴로워 죽겠는 내 실수에 남이 이토록 관대할 수 있다는 것에.
 
어제 충동 구매한 기차 티켓이 감당이 안 된다. 어찌저찌 가긴 가겠지. 내일 걱정도 이른데 토요일 걱정은 무슨.
 
오늘도 하루종일 나가지 않았다. 전시회도 가지 않았다. 내일은 강제로 회사에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사실 어떻게든 집에서 해도 되지만 이러다가 정말 정말 돌이킬 수 없이 집에 묶여버릴 것 같아서 결심했다.
 
 
 
 
 
 
2023.11.16.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침대에 한 번 붙으면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 상태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온갖 영상을 보여주는데 참, 순기능이기도 하면서 이런 대형 수집과 관찰 분석은 조금 징그럽다.
 
이 상태로는 운전하기도 싫고, 현금도 뽑아야겠고, 굶으면 머리가 안 돌아갈 것 같아서 두나플라자에 들렀다. OTP 은행 ATM기에 현금이 없는지 오류가 나서 3층까지 올라갔다. 예전에 여기서 웃고 떠들고 했던 내 모습이 기억났고 낯설었다. 낯설어서 다행이다. 이게 디폴트고, 그게 낯선 것이 나아. 스타벅스에서 바닐라 크림 콜드브루 라떼를 먹고 싶었지만 설명하기 귀찮고 원하는대로 만들어 주리란 확신이 없어 그냥 맥도날드에서 맥치킨만 샀다.
 
맥치킨 하면 기억나는 귀여운 일화가 있다. 언젠가 공항에 이사님 내려드리고 맥도날드에 들르며 신입에게 뭐 사다줄까 물으니 맥치킨 버거를 사다달라고 한 적이 있다. 전해주고 맛있게 먹었냐고 카톡으로 물어보니까 너무 따뜻하고 너무 맛있었어요.. 라고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귀엽고 와닿는지. 그때부터 나도 맥도날드 가면 맥치킨만 시킨다. 우리 신입 말대로 너무 따뜻하고 너무 맛있다.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고였다. 부사장님이 걱정하는 얼굴로 반겨 주셔서 그랬다. 가끔 출입문부터 우리 팀까지 쭉 이어진 복도가 한없이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저기까지만 가면 돼, 라고 생각할 목적지가 있어서 다행이다. 자리에 앉아서 일하니까 금방 안정되었다. 생각해 봤는데 난 일이라도 안 하면 정말 큰일날 것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그냥 회사라도 착실히 다니면서 내 상태가 나아지길 바라야지.
 
화요일에 갔던 상담사에게서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길 원한다는 메일을 받고 다른 곳을 찾겠다고 하였다. 다른 상담사에게서 답장이 왔는데 모두 예약이 많다고 난리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저녁에는 마사지를 갔다. 두 달만에 보는 거라고 하는데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믿기질 않았다. 다음달에는 더 좋은 소식 갖고 오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정말, 정말 그러고 싶다.
 
회사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이 캄캄했다. 일은 하기 싫은데 어쨌든 끝내야 할 목표가 있으니 좋다고 느꼈다. 법인 하나 끝냈는데 12시가 넘었다. 기존 회계사가 정말.......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그래도 내일은 내가 기장한 장부로 보고서 만드니까 훨씬 쉬울 것이다. 집에 택시를 타고 가려고 Bolt를 불렀는데 사무실 나오자마자 핸드폰이 꺼졌다. 택시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려니 건물 문이 잠겨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걸었다. 매일 오고 가던 익숙한 길인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정말 무서웠다. 무섭다는 건 내가 아직 살고 싶다는 것이다.
 
 
 
 
 
 
 
2023.11.17. 금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늦게 출근해서 늦게 퇴근했다. 일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전날 너무 늦게 갔는데다 다음날 아침 기차여서 일찍 집에 갔다. 하루종일 에너지바 하나 먹은 게 다라서, 일본식 라면을 또 시켜먹었는데 후회스러웠다. 매번 시켜놓고 아 이 맛이었지, 하고 또 시키고 후회하고.
 
윗집에 누가 새로 이사를 온 건지 아니면 이제야 내가 주변 둘러볼 정신이 생겼는지. 새벽 2~3시까지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예민해져서 잠을 못 잤다. 쪽지를 갖다 붙일까 아니면 천장을 두드려 볼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다가 겨우 잠들었다.
 
 
 
 
 
 
 
2023.11.18. 토요일
비엔나, 흐림
 
여행기는 따로 작성하도록 하고... 요약하자면 결국 아이폰은 안 샀고, 에르메스는 근처에도 안 갔으며, 벨베데레, 레오폴트 다 안 갔다.
 
 

 
오히려 계획에 없던 3대 자허 카페에 줄 서서 기다려 먹고 한국식 샤브샤브를 드디어 먹었으며, 내추럴 와인 샵이 있길래 거기도 가고 뭐 어쩌고 하다보니 박물관 갈 시간도 없었다.
 
부랴부랴 기차역에 서둘러 갔건만 기차가 무한정 연착되고 있길래 환불해버리고 호텔을 잡아서 잤다. 와인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여러 종류를 많이 마셨다.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다.
 
 
 
 
 
 
 
2023.11.19. 일요일
부다페스트, 비
 
어제 그냥 기차 기다려서 집에 갈걸 싶을 정도로 하루종일 피곤했다. 깨끗하게 청소했어도 낡은 티가 너무 나는 그 호텔방에서 아침도 안 먹고 12시까지 뭉개다 나왔는데 얼마나 피곤하면 걸어다니면서 졸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미술사 박물관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번역도 발음도 이상한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데 체력이 안 되고,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오늘 먹은 식사들이 하나같이 기대 이하라 집에 와서는 인도 커리를 시켜먹었다.
 
윗집 쿵쾅대는 소리에 내가 이제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것 같다. 일찍 누워도 의자 끌고 뭘 집어 던지고 쿵쾅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윗집이 쿵쿵거리는 거나, 낡은 호텔에서 윗방 발걸음소리, 옆방 대화소리가 들리는 거나 시끄러운 건 똑같은데, 내 집인데 왜 내 맘대로 쉬지도 못하지? 하는 마음과 저 인간들은 도대체 이 새벽까지 뭐하길래 저 지랄이지? 라는 호기심(?) 때문에 집에서 층간소음을 견디기가 더 힘든 것 같다. 백색소음을 크게 틀어놓으니 그래도 발걸음 소리는 안 들려서 겨우 잤다. 쪽지고 나발이고 알아 듣기는 할까. 어느 국적 인간들일까.
 
 
 
 
 
 
 
2023.11.20.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회계법인에 밀린 자료를 아침에 던져주었다. 아무리 늦는다 늦는다 해도 데드라인 당일에 던지는 이런 무책임한 짓은 내 기억에 일하면서 처음이다. 사실 일요일에라도 하려고 했지만 비엔나에서 예상치 못한 1박을 하는 바람에. 회계법인을 정상적인 곳으로 바꾸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한 와중에 이젠 내가 너무 게으른 것 같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업무 바보 질량 보존의 법칙 뭐 그런 건가. 이젠 내 실수나 나의 게으름이 수치스럽지도 않다. 점점 그냥 무뎌져 간다.
 
아이폰은 한국 가는 3월까지 버티기로 했는데 계속 또 미련이 남는다. 찾아보니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보다 15만원 더 비싸다. 그냥 눈 딱 감고 사올걸 그랬나. 가격도 알고 필요한 모델도 알고 심지어 색상 고민조차 없는데 이렇게 선뜻 안 사지는 건 또 처음이다. 지금 쓰는 핸드폰이 1년밖에 안 되어서 그런가 보다.
 
점심에는 집에서 밥을 먹었다. 왔다 갔다 하는 데 30분이나 걸리고 밥먹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지만 제일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 갇힌듯 회사에 있는 것보단 낫다.
 
에르메스에서 잃어버린 목걸이에 대해 답장이 왔다. 단종된 모델이라 재주문이 불가능하다고. 아. 그럼 영영 안녕인가보다.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자. 다른 파인쥬얼리가 아니라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저녁에는 회식이 있어 갔다. 즐거운 척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이다. 본부장님이 너무 걱정하셔서 눈물이 났다. 솔직히 아직 회사 나올 때도 아니었던 것 같고, 회식은 더더욱 무리였나보다. 왜 나는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 걱정만 끼칠까. 이 나이 먹고도 왜 이렇게 감정에 솔직할까.

 
밥이 안 먹혀서 술도 애매하게 마셔 집에 와서 오스트리아에서 사온 와인을 땄다. 다 신문지에 감싸져 있어서 나름 그 뭐냐, 시크릿 박스 여는 기분으로 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산지오베제 품종이라 맛있게 마셨..어야 맞지만, 이젠 와인도 질리려고 한다. 포도로 만드니 산미는 어쩔 수가 없는데 아주 작은 신맛에도 확 질릴 때가 있다. 두 잔인가 마시고 다시 닫아두었다. 귀한 와인 괜히 따서 버리기 전에 CORAVIN을 어서 사야겠다. 내 셀프 생일선물로 12월에.
 
아, 그리고 오늘 드디어 청소 서비스를 불렀는데, 회식하고 집에 돌아오니 깨끗이 청소한 세제 냄새에 말끔해진 부엌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유지하고 살 자신이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불러야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