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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035 (20231121~20231126)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35 (20231121~20231126)

여해® 2023. 11. 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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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오늘은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어지러워서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포카리 스웨트를 많이 마셔봤는데 소용 없었다. 하긴 뭐 이게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어제 청소 서비스를 부른 덕에 깨끗한 집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진작 부를걸 싶다.
 
어제 구매한 1구 인덕션이 벌써 왔다. 테스코에 있는 Alzabox에서 픽업하고 새로 쓸 냄비도 샀다. 신입을 집에 초대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샤브샤브인데 이제 야매(?) 중국식 훠궈 그만 먹고 집에서 좋아하는 재료로 해먹어야지. 익반죽으로 수제비도 만들었다. 국물은 오뚜기 메밀소바장국으로 했는데 너무 달아서 간 맞추느라 정말 힘들었다. 다음에는 코인 육수 얻어서 그걸로 해야겠다.
 
몇 개월을 미루고 미루던 해외정착지원금 신청을 오늘 겨우 마쳤다. 매번 최선을 다한 건 아니지만 올리고 반려되고 나도 까먹고 신입이 다 하셨냐고 물어봐주고.... 정말 긴 여정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인연이면 받고 아니면 말겠지.
 
돌아보니 벌써 한국을 떠난지 일 년이 넘었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살아갈지, 무엇을 하면서 살지, 이제 슬슬 정해야 할 때다. 미리 정하고 왔으면 훨씬 계획적으로 살았을 텐데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야지. 
 
 
 
2023.11.22.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부터 정착지원금 반려 메일을 받았다. 다 끝났나 싶었는데 또 시작이라니 그냥 진짜 더는 들여다 보기가 싫다. 이제 이런 작은 퀘스트도 깨기가 싫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지겹다.
 
해장하려고 쌀국수를 시켰다가 입맛이 없어 취소했다. 매운 새우깡을 먹었는데 속이 더 안 좋아졌다. 점심에는 컵라면으로 된 쌀국수를 먹었다. 이렇게 쓰니까 일기가 아니라 무슨 게임 상태창 같다.
 
안경을 안 갖고 나와서 하루종일 업무 효율성이 별로였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햇빛...... 또 햇빛이.. 너무 강하고 더 힘들었다. 오후에 드디어 창문에 썬팅 시트지를 붙였다. 태양이 정말 지겹도록 쨍쨍하다. 시트지 붙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포 수준이 아니라 중간중간 다 일어나고 난리였다. 내가 붙인 쪽을 보니 너무 엉망진창이라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집 인테리어 할 때 시트지 인력은 정말 비싸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직접 해보니 정말 고급 기술이다. 하드웨어 구축이 어려워 이런 기술직이 AI한테 대체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가시손이라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마요르카에 가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마요르카는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하는 직항이 4월까지 없어서 못하고 대신 알리칸테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해산물 부페 사진에 알배기 꽃게가 있는 것을 보고 충동적으로 지른 것이다. 여기는 빠에야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이번엔 2인분이든 말든 무조건 꼭 빠에야를 먹어봐야겠다.
 
이렇게 또 12월 중순까지 쉬는 주말이 없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마음에 병이 나는 체질이라서 그렇다. 이번 주말에는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이나 실컷 할까 했는데 이게 더 낫겠지. 따뜻한 나라에 갈 생각에 설렌다. 해변 앞에 숙소를 잡았다. 중간에 한국 카드가 자꾸 결제가 막혀서 구매하는 데만 한시간이 걸렸다. 이 의지로 정착지원금도 다시 해보자 다독이며 재신청했다.
 
저녁에는 부사장님, 신입과 함께 진도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회를 오랜만에 먹었다. 전날 샤브샤브에 와인을 많이 마셔 오늘은 술을 조금만 먹었다. 간만에 즐거운 식사였다. 유익한 대화도 많이 했다. 매일매일 오늘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3.11.23.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부터 또 정착지원금 반려 메일을 받았다. 나름 남의 서류 검토하고 취합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내 서류는 왜 이렇게까지 틀리는 건지 모르겠다. 반려 사유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이럴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다.
 
창문에 시트지를 붙여놓았더니 좋다. 햇빛은 여전히 숨이 막히지만 더위가 훨씬 덜하다. 진작 붙일걸 그랬다.
 
회사에 또 이상한 얘기가 도는데 나는 아무 정보원이 없어서 모르겠다. 거의 처음으로 궁금한데 알아 볼 곳이 없다.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캘린더에서 12월 일정을 보는데 정말 완전 꽉 찼다. 언제 이렇게 야금야금 채웠지. 여기에 만약에 크리스마스에 이탈리아까지 가면 정말 쉬는 주말이 하나도 없겠다. 
 
지난 번에 미룬 상담이 오늘이었다. 사실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갔다. 가면서도 시간과 체력이 아깝게 느껴졌다. 지금 내 상태가 꽤 괜찮은 거 같아서.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더 잘 알게 되고. 중간중간 내 말이 끊길 때 내가 한 말을 요약해 주는 것도 아주 좋았다. 그런데 상담 끝날 때쯤 청천벽력같은 소릴 들었다. 본인이 감당할 범위가 아니고 직업 윤리에 의해 의사한테 보내야겠다고. 
 
나는 솔직히 내 마음의 병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뚜렷한 증상도 없어서 신기루같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떻게 그 몇 마디 말들로 날 판단해. 멍하니 걷다가 비빔밥에 가서 혼자 삼겹살을 먹었다. 예전에 독일에서 지낼 때 헝가리 놀러올 때마다 먹었던 똑같은 구성으로. 이렇게 밥도 잘 먹고 이렇게 멀쩡한데 내가 심각하게 아프다고? 이해가 안 됐다.
 
층간소음이 갈수록 심해진다. 내 귀가 이미 예민해진 탓인가 백색소음도 점점 소용이 없다. 오후8시~새벽1시까지 쉬지 않고 무거운 물건을 던지거나 쿵쿵 찧으며 걸어다니는데, 그것만 들어봐도 정상적인 패턴을 가진 사람 같지 않아 찾아가 말해 볼 생각도 안 든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2023.11.24.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잠깐 여기저기서 카드가 다 안 통했다. 여러 군데에서 안 되는 것을 보니 단말기의 통신사 문제인 듯 했다. 마침 갖고 있던 현금을 어제 다 써버려서 당황스러웠다. Shell에서 주유는 못했지만 타이어에 공기를 넣었다. 왼쪽 앞바퀴가 저번부터 너무 낮은 공기압을 보인다. 내가 너무 험하게 몰아서 그런가.
 
다른 주유소에 들러 다행히 주유를 하고, 맥도날드에서 오랜만에 맥모닝을 샀다. 신입한테도 먹으라고 사다 주었다.
 
어제 만났던 상담사가 보낸 메일에 있는 추천 의사들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미국에서는 몇 마디 위험하다 싶은 말을 하면 강제로 입원을 시킨다고 한다 (거부하면 경찰 부른다고 한다고). 유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되니까 내 상태를 다 털어놓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매일 꾸는 꿈은 내 무의식의 인디케이터쯤으로 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깨고 나서 현실에 허무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젠 시들해졌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왜 이게 더 위험하다는 것인지 솔직히 주관적이며 비전문가인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된다. 총 다섯 군데에 메일을 보내봤는데 이미 한 곳에서 거절 메일을 받았다. 이거야 말로 의욕 상실이다.
 
영주권, 시민권, 투자, 사업 등등 여러 블로그를 구경하다가 아주 극과 극으로 흥미로운 블로그 두 개를 발견했다. 하나는 부의 추월차선+스마트스토어+경제적 자유 어쩌고저쩌고 타령하는 젊은 남자의 성공기, 하나는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며 유럽에서 그림처럼 살고 있는 젊은 여자의 일상 블로그. 전자는 개인적으로 비호감에 가깝지만 한편으론 존경스럽고, 후자는 여러모로 멋진 삶을 사는 게 좋아 보인다.
 
평소에 친구들 인스타도 피드에 떠야 겨우 관심 갖고 보는 나지만 이렇게 가끔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 사는 걸 구경하면 나만의 뭔가를 구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 정신이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다. 어제 떠들면서 느낀 게 있는데, 나는 항상 WHY를 찾는다. 그게 없으면 힘들어한다. 공부할 때도 단순암기를 특히 못했고. 납득이 가는 이유가 있어야 기억했다. 그렇다고 그게, 내가 구제불능으로 약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돈을 벌고 있지만 이유가 없다. 매일 회사에 나와 열심히, 내 책임을 다하고 있지만 다른 이유가 없다. 동기부여가 될만한 목표가 없다. 그게 근본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건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치료 안 받는 게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번에 보낸 메일을 끝으로 더는 예약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퇴근 후 정말 오랜만에 physiotherapy를 받으러 갔다. 운전하는데 30분이나 걸렸다. 예전에 꾸준히 가서 치료받은 게 대단하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6월이랜다. 딱 그때부터 정신 놓기 시작했으니 참 정확하기도 하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 뭘 했냐고 하는데, 마음 고생이라고 대답하기 궁색해서 그냥 많이 걸었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저녁에 곱창에 와인을 먹었다. 1구 인덕션 덕에 살 다시 찔 거 같다.
 
 
 
 
2023.11.25. 토요일
알리칸테, 맑음

새벽 3시 50분에 눈을 떴다. 진짜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어서 4시까지 누워있다 겨우 씻고 나왔다. 아침 6시 비행기는 확실히 무리이다.


공항버스에서부터 풍경이 너무 좋았던 알리칸테.

여행기는 따로 써야겠다.



2023.11.26.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인심 좋은 호스트 덕에 체크아웃을 4시 30분이 되어서야 했다. 점심을 어제에 이어 또 수제비로 먹었는데 이번 것은 반죽을 실패했다. 글루텐이 너무 심하게 생겨 흐물흐물 난리가 났다.

공항 가는 길에 시간이 남아 마그넷도 사고 산책도 했다. 오랜만에 fake love가 재생되어 나왔다. 농담으로 따라했던 가사가 이제야 와닿았다.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해. 사랑은 뭐가 사랑. 진짜 부질없는 사랑했구나.

크리스마스 연휴에 고맙게도 친구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간다. 비행기표를 끊었다.

부다페스트에 내리니 영하 1도였다. 가벼운 자켓 하나 입었는데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온라인으로 사전정산 했던 티켓이 또 말썽인데 잘 해결되었다. 집에 오자마자 입었던 옷은 건조기 돌리고 (빈대 걱정돼서) 씻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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