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33 (20231107~20231113) 본문
2023.11.07.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열 두 시, 네 시, 여섯 시. 세 번이나 깼다. 몸이 정말 안 좋았다. 일곱 시에 겨우 잘 수 있을 것 같아 회사에 늦는다고 연락하고 한 시간 더 잤다. 강에서 건너온 안개가 자욱했다. 걷히면 나가야지 했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졸릴 때라도 자야지, 하고 눈을 붙였는데 점심시간이 넘도록 무력하게 누워있었다. 모로 누워 창문을 보고 있는데 배가 계속 아팠다.
얼마나 울어야 그치는 걸까. 아무리 눈물이 많은 편인 나라고 해도. 하루에 마시는 물 중에서 3분의 1은 눈물로 나가는 것 같다. 나와서 걸으니 머리가 아팠다.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회사 가는 길에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 자신한테 아무 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 굶을 거 아니니까, 남들은 일부러도 단식하는데.
사무실에 오니 커피머신이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깨끗하고 신식이라 좋다는 생각에 앞서 자산 등록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샀을까 라는 생각부터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가 없나보다. 계속 어지러워 사탕을 하나 먹으니 좀 나아졌다.
번역 일은 못 한다고 통보했다. 뭐라도 해서 정신 팔릴 수준이 지났다. 여기서 뭘 더 하면 정말 위험할 것 같다. 11월 한 달만이라도 제발 가만히 있자. 회사 일도 겨우 마쳤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재택하겠다고 팀원들한테 말하는데 미안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2023.11.08.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회사에 안 갔다. 이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며칠이나 벌 것인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 자신을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수영은 다른 날로 미루었다. 이사님께 전화를 드려서 지금 상태가 어떠하고, 어째서 12월 말까지 못 나오겠는지 말씀 드렸다. 따뜻하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했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하고 똑똑하게 믿음을 준 덕이라고 하시지만, 아니다. 회사라는 건 원래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나도 운이 좋은 셈이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보기 싫은 걸 봤다. VPN 세팅을 하자마자 못 참겠어서 네 시쯤 나왔다. 30분 정도 두나 강가를 산책했다. 이제 눈물은 그친듯 했는데 집에 와 누우니 또 시작이었다. 테라플루를 타 마시고 잤다.
2023.11.09. 목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일도 거의 못 했다. 번역 에이전시에서 계속 조금만이라도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다. 마지못해 받아들였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못하겠다. 아, 나 좀 그냥 내버려둬.
테라플루를 마셨는데도 새벽 세시까지 잠을 못잤다. 몇 번 먹지도 않았는데 내성이 생겼나. 눈이 때꾼해져도 멈추지 않고 게임만 했다. bit life라는 게임인데 아주 단순한데도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게임인데 하다보면 내 인생도 그냥 게임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싶어서. 내일은 집이라도 치워볼까. 그 생각조차 싫어서 눈을 감았다.
2023.11.10. 금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확실히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원인으로부터의 단절이다. 몸은 기름때에 찌들고 집은 엉망이고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회사에 안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다. 메일함까지 안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어서 급한 것 몇 가지만 했다. 그래도 7시간은 훌쩍 간다.
아무튼 상태가 훨씬 나아지고 있다. 다 나은 것 같아도 다 나았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어디에든 말하거나 쓰면, 어 그래? 정말 니가 다 나은 거 같아? 하면서 바로 온갖 에피소드가 덤벼드는 것 같으니. 그래도 이대로 일주일. 또 일주일. 시간을 좀 벌면 회사에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친구가 일, 웃긴 밈 따위로 어떻게든 이유를 대서 연락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는 있는지, 괜찮은지 확인하려는 눈치다. 괜찮고 안 괜찮고가 아니라 아무 기력도 없다. 이렇게 타자 치고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그러나 친구도 어느정도 하면 그만할 것이다.
11월에 아무 여행도 안 잡혀 있어 다행이다. 아무리 내멋대로 하는 나여도 비행기 예약해둔 걸 안 타고 쌩깐 적은 없는데 이번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크리스마스에 온다고 하더니 어마어마한 비행기 가격때문에 망설이는듯 하다. 와도 잘 챙겨 줄 자신이 없어서 될대로 되라지 하고 있지만, 사실 깊은 속으론 와 주었으면 좋겠는지 꿈에 나왔다. 이 친구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친구는 교포니까 영어로 말해야 해서 피곤하기도 했고, 한국 가서 단둘이 못 있었고, 서로 바빴다. 이 모든 걸 얘기하면 제일 잘 이해할 친구인데도.
그러고 보면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더 먼 친구들한테는 잘도 하고. 이야기 할 상대를 정하는 기준은 참 대중없다. 오죽하면 내 이런 미주알고주알 자세한 얘기를 회사 옆 마사지사가 알 정도니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들은 후로 내가 겪는 모든 일에 다 대입할 만큼 좋아한다. 종교적으로 모두 신의 뜻에 맡긴다 이런 순종적인 태도는 아니고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오히려 반대다. 납득이 안 되면 일이고 공부고 아무 것도 못하는 고집불통이라서 그렇다. 도대체 왜? 하는 억울한 마음도 있고.
그래, 도대체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생길까. 왜. 성실하게 살았고 나는 그냥 타지에서 조금 외로운 것 뿐이었는데. 왜 하필 원하지도 않는 자극과 도파민을 주고는 한 순간에 이렇게 큰 빚을 갚으라고 하나. 이유가 있겠지,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알게 되겠지, 하다가 그 생각도 이젠 흐릿해진지 좀 됐다. 이유 따위 없으면 어때. 내가 영영 모르면 어때. 알아서 뭐해.
이렇게 밑바닥을 치고 있으니 한 가지 뚜렷해지는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보인다. 몇 년 전부터는 와인을 가장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제일 좋아하나보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도 생명줄처럼 붙들고 하는 건 두 가지뿐이다. 여기는 공개된 공간이라 이렇게 자제하며, 내용을 한정해 쓰는데도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써야 비로소 남의 일처럼 바라봐진다.
생각해보면 내게 부족한 게 뭔가. 이렇게 다 누리고 있는 주제에 도대체 뭘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나. 몇 년 전 장난처럼 적었던 소원이 다 이뤄져있다. 회사 근처에 살고 있고, 강변에 살고 있고, 자유롭고, 내 업무만 하면 되고, 급여도,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샤넬 던지면서 울고 싶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걸치고 싶은 거 다 걸치고 앉아서 이 감정적 사치가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부족한 게 없어서 이 모양인가. 몇 살을 더 먹어야 애처럼 그만 보챌까. 이런 말 자체가 창피한 나이를 먹어놓곤.
이걸 쓰고 있다가 거실부터 치웠다. 내일부터는 쾌적한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 치우다 보니 욕실도 청소하고 싶고 빨래도 하고 싶어지고 설거지도 하고 싶어졌다. 뭐라도 해보려고 움직이고 힘이 생기니 울 힘도 생겼는지 눈물이 또 났다. 신기하게 흐를 만큼 나진 않았다. 물 마신 게 없어서 그런가. 욕조를 박박 닦다 보니 생각이 사라졌다. 엄마가 왜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 청소로 풀어버리는지 알 것 같다. 이제 냉장고랑 변기 청소만 하면 되겠다. 사실 무서워서 회피 중이었는데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2023.11.11. 토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일본식 라면을 시켜 먹었다. 국물을 3분이나 데워도 뜨겁게 데워지지 않고 더 하면 그릇이 깨질까봐 그냥 먹었다. 괜히 면사리 시켰다가 통째로 다 남겼다. 겨우 치운 집이 더러워졌다.
2023.11.12.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회사에 나갔다. 우리 팀 간식이라고 배달시켜둔 것도 이제 갖다놓고, 새 얼음틀도 가져다 놨다.
한낮인데도 내 방이 이제 사우나 같지는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일하려니 춥기까지 했다. 햇빛에 바람에 블라인드가 차르르 소리를 내는데 순간 내가 굉장히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 생각이 나서 잠깐 울었다. 이제 정리하는 마음으로 우는 것이라 기분이 많이 나쁘진 않았다. 우리 팀원들이 나 없이도 열심히 뭔가 해둔 결과물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왜 내 맘처럼 일하지 않느냐고 답답해 했던 게 먼 옛날 일 같다. 어서 복귀하고 싶다. 나아지고 싶다.
일 마치고 일어서니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어서 리들을 갈까 했는데 늦어서 테스코로 갔다. 테스코에서 파는 것은 아주 얇은 대신 양이 적어서 혼자 먹기에 좋았다. 삼겹살 320g이 Jana 물 6병보다 저렴했다. 헝가리가 고기는 정말 저렴하다. 퍼실 빨래 캡슐도 샀다. 지난 번에 돈 아낀답시고 싸구려 캡슐 샀는데 그거 다 쓰는 내내 내가 나를 이따위로 대접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던 탓이다.
집에 가는 길에 이번 주에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대충 찍었다. 빛 번지고 난리도 아니다.
2023.11.13. 월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하루종일 아팠다. 마음 아픈 게 몸까지 온 것 같다. 일주일은 쓸 수 있을 만큼의 바디샤워를 풀고 불리 오일을 뿌려서 목욕을 했다. 좋아하는 향에 둘러 싸여 누워서, 지쳤다. '나의 사소한 슬픔' 이라는 영화를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봤는데, 그런 내용인 줄 알았으면 지금은 안 보는 게 나을뻔 했다. 영화에서 언니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랑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
내일은 처음으로 psychologist와 세션을 예약해 두었는데, 솔직히 부다페스트에서 상담소를 검색해 보면 학력이나 이력이나 썩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이 일을 업으로 삼고 나보다 공부 많이 했을 사람한테 털어놓는 것도 좋겠지 싶어 대충 멀지 않고 영어가 되는 곳으로 골랐다. 전날 미리 연락도 주고 세심함이 느껴져서 내심 좋았다. 온라인/오프라인 세션을 고르라기에 간만에 낯선 데로 가보고 싶기도 하고, 어찌됐든 나갈 핑계라도 있어야 한 번은 나가겠다 싶어서 오프라인으로 하자고 했다.
집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윗집 소음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시끄럽다. 2년 전 독립했던 집에서 층간소음으로 고생 엄청 했었던 기억이 나서 웬만하면 저쪽으로 신경을 안 쓰려고 한다. 그런데 또 고마운 건, 그렇게라도 신경이 쏠릴 요소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아픈 마음이 조금 내려놔진다는 것.
저녁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얼마 전 실연했다. 무슨 기분인지 너무 알고, 또 내겐 너무 끝난 감정이라 그냥 한시간 정도 들어만 줬다. 입맛이 없어서 먹던 걸 놔두고 누워서 한없이 게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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