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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030 (20231017~20231023)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30 (20231017~20231023)

여해® 2023. 10. 2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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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7. 화요일
수원, 맑음
 


약속 전에 롯데백화점 베네피트 브로우바에 갔다. 너무 오랜만에 해봐서 아픈 걸 잊고 있었다. 처음 딱 떼자마자 그만한다고 하고 싶었다. 직원이 친절하고 예뻐서 그만 충동구매를 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소래포구에 갔다. 어쩌다보니 찢어져 자연스레 연락 끊긴지 어느새 8년이 넘어있었다. 나는 8년 전에 몹시 말랐고 지금은 몹시 쪘기 때문에 친구들이 날 보고 변했다 그대로다 아무 말도 못했다. 반면 친구들은 정말 그대로였다. 너무너무 반갑게.
 
또 꽃게를 먹고 새우를 먹고 2차로는 와인 바에 갔다. 내년에 결혼한다는 동기가 둘이나 되었다. 이런 걸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언제부터 결혼 생각이 싹 사라졌던가. 
 
 
 
 
2023.10.18. 수요일
수원, 맑음
 
전날 막걸리+청하+와인 이렇게 먹은 게 정말 미친 짓이었다. 많이 먹진 않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약속 있는 노량진 도착하자마자 생선 냄새에 한 번 욱 올라오고, 약국 가서 약을 사먹었다. 약간 한심해하는 얼굴로 보시는데 뭐 그럴만 했다. 대낮이었다.
 
대게, 회를 먹고 카페 갈 곳이 하도 없어 진짜 엄청 오랜만에 이디야에 갔다. 익숙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없이 즐거웠다.
 
 
 
 
 
2023.10.19. 목요일
산본, 비
 
학교같이 다녔던 회사 놀러가려고 대표님한테 연락 다 해 두었는데, 점심 시간 이후에 가겠다고 하니 11시 30분까지 오라셔서 정말 부랴부랴 집에서 나섰다. 설상가상 비까지 오는데..... 내가 급하게 나오느라 목걸이를 잘못 했는지 자물쇠 금속 펜던트가 사라져 있었다. 이것도 노르웨이에서 산 건데, 그래. 잘 가라. 두 달도 못했던 거 너무 아깝지만 찾을 시간도 없었다.
 
빈 손으로 가기가 좀 뭣해서 찾아보니 시청역 근처에 얼마 전 갔던 조선호텔이 있었다. 홀케이크 포장하겠다 전화해두고 가는데, 같은 역이어도 조선호텔에서 SFC는 너무 멀었다. 비도 오고 칼국수 생각이 났는데 대표님이 샤브샤브를 사 주셨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 보니까 너무 좋았다.
 
퇴사하고 삼성역에 내추럴와인 바 겸 카페를 차린 동료분네 놀러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와 와인 얘기를 하다 보니 한두시간 있으려던 게 세시간이나 지나버렸다. 동생네 도착하니 7시쯤 되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해물은 이제 질려서 하남돼지집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술 한 잔 안 먹고도 10만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집에 가려는데 너무 피곤하고, 동생이 붙들기도 하고 해서 동생네서 잤다. 새벽에 오랜만에 철딱서니 없이 동생이랑 둘이 몰래 야식 시켜먹고, 가방도 하나 얻었다. 출근해야 하는 제부한테 미안했다.
 
 
 
 
2023.10.20. 금요일
수원, 맑음
 


다음날 비행기가 8시이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 날. 동생네서 9시부터 눈을 떠 부지런히 근처 내과에 비타민 수액을 맞으러 갔다. 효과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동생 차 타고 수원으로 돌아가는데 운전이 험해서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안경점에 가서 여분으로 많이 맞춰둔 안경을 픽업하고, 팔달사에 또 갔다. 이번에는 아무렇지 않지 않고 조금 눈물이 났다. 떠나려니 아쉬워 그런가, 아니면 다시 그 울고불고 하던 일상이 시작될까봐 두려운가. 탑돌이를 원없이 하고 나니 진정이 되었다. 어차피 시간이 알려줄 것. 어차피 미래의 나는 다 알게 될 것.
 
저녁에 가족들이랑 다같이 저녁을 먹고, 정말 막간을 이용해 동네 사는 친구와 만났다. 단골 돈까스집에 가서 영업시간 지나도록 2차 밥을 먹고, 카페가 마땅치 않아 파리바게트를 갔다. 다이소 가서 필요한 게 없나 다시 한 번 보는데 뭐랄까 그 당시에는 아무 미련이 없다. 너무 미련이 없어서 바보같이 엽떡 밀키트 주문하는 것도 깜빡했다.
 
 
 
 
 
2023.10.21. 토요일
트레비소, 맑음
 
새벽 네시에 일어났다. 엄마 아니었으면 아예 못 일어날뻔 했다. 출국장에 들어오지도 않고 엄마아빠는 날 내려주고 쿨하게 떠났다. 내년 3월에 또 올 거니까 나도 큰 미련은 없다.
 
전날 비즈니스 비딩에 성공했다가 카드 결제가 거부된 나.... 간절하게 바라봤지만 결국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탔다. 출국장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라운지고 뭐고 면세품만 겨우 찾았다.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자서 정말 피곤해 미치는 줄 알았다.
 
LOT 프리미엄이코노미 탄 소감은, 아, 몸이 불편하면 잡생각도 안 나는구나. 절대 그 돈 주고 업그레이드 하지 말라고 모두를 뜯어 말리고 싶다. 이 글 쓰는 지금도 그 가격에 그 서비스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그 돈으로 그냥 애플워치 살걸. 오래 앉아있으니 정말 무릎이 너무 아팠다.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하니까 인천 공항보다 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평생 지금까지 인천 공항보다는 부다페스트 공항을 더 많이 가 봤을 것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려니 그렇게 됐다. 베네치아로 가는 비행기가 저녁 7시였는데, 어차피 짐도 놔둬야 하고 minibud 예약해둔 것도 있고 해서 집으로 갔다.
 
부다페스트는 아직 한국보다 덥고, 비가 내렸다. 익숙하면서도 아직 나에겐 너무나 낯선 타지인 부다페스트 곳곳을 보다보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한국에서는 하루 두 번씩 잡혀있는 약속에 기가 질려 부다페스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는 왜 저기서는 여기를, 여기서는 저기를 그리워하는 그런 떠돌이를 자처할까. 가로수들은 2주 사이에 낙엽이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나름 치우고 갔다 생각했는데도 난장판이라 들어서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침대에 한 시간 정도 누워있다가 생각한 시간보다 일찍 나왔는데, 그러길 잘했지. 차에 시동이 안 걸렸다. 2주 놔두었다고 배터리가 이렇게 될 수가 있나. 메트로-공항 버스를 타고 일단 공항에 갔다.
 
주말 저녁 비행기인데 의외로 지연도 전혀 안 되었고, 12시간 비행기 타고 온 나에게 1시간 30분은 정말 찰나였다. 요즘은 비행기에서 인터넷과 단절되어 책이나 읽을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이 참 고맙다. 책벌레였던 나도 핸드폰에 인터넷 보급된 뒤로는 (언제적 얘기..) 책을 멀리하게 되었으니까.
 
라이언에어는 트레비소 공항으로 들어간다. 공항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트레비소에 첫날 숙소를 정했고 정말 잘한 일이었다. 뭔 공항에 택시도 한 대 없고, 오죽하면 숙소 호스트가 데리러 나온다고 할 정도니. 포르쉐 카이옌을 몰고 온 호스트는 멋진 중년 여성이었다.
 


숙소에 백팩 내려놓고 시내(?)까지 가보았는데 웬 일본 라면집이 있길래 10분 정도 기다려서 라면을 먹었다. 나름 면도 제대로 일본식 라면이었고, 국물이 벌써 그리웠던 나에겐 최고의 식사였다.
 
 
 
2023.10.22. 일요일
베네치아, 맑음
 
태풍이 오니마니 라이언에어에서 비행기 안 뜰 수도 있다고 겁을 줘서 걱정한 것과 달리 완벽했던 날씨. 베네치아는 여행기를 따로 작성해야겠다.
 
 
 
2023.10.23.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트레비소 공항으로 돌아갔다. 출발 30분 전까지도 보딩 시작을 안 하길래 또 지연인가 했는데 제 시간에 출발했다.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했는데 택시 타고 하는 멀미도 만만치 않겠어서 그냥 버스를 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는데 다행히 썩은 음식은 없었다. 2주만에 차까지 고장나고 나니 별 게 다 무섭다. 빨래는 이미 한국에서 다 해왔고 김치볶음밥이나 양껏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고 맥주 반 병을 마셨다.
 
이런 말 함부로 여기 전시하듯 하고 싶지 않지만,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던 8~9월을 거쳐 한국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날이 궁금하지 않아서 살 의지가 들지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을, 명상과 절 오고가고를, 가족 친구들과 대화하고를 수없이 반복하고 내가 돌아오면 소소하지만 꼭 하겠다고 다짐한 게 있다. 적으면 다짐이 또 다져질까 싶어서 적어본다.
 
첫째, 매일 운동할 것. 둘째, 최소 한 끼는 자부심 느낄 정도로 건강하게 먹어서 깨끗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것. 너무 자주 아팠으니까. 셋째, 하고자 했던 일은 일단 시작하고 볼 것. 끝으로, 나를 위해서 살 것. 순간순간 어디로 집중이 흩어져도 어떻게든 다시 내게 돌아올 것. 나. 나. 그냥 나.
 
적어도 이 네 가지를 해보고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렇게 내 자신과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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