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25 (20230817~20230823) 본문
2023.08.17. 목요일
부다페스트, 흐리고 비
오후에 큰일이 있었다. 집에 동료분의 차를 얻어타고 돌아왔다.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집에 오자마자 테라플루를 타먹고 방에 처박혔다. 미안해 죽겠다.
2023.08.18.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출근하지 못했다. 언니는 나가지 말라 했지만 하루하루 밀리는 일에 더 아플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씻었다.
오전 11시즈음 나가 6시까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마주칠까 싶어 나갈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그 방에 더는 못 있을 것 같아 재택하겠다 양해를 구하고 싹 치우고 나왔다. 일주일은 벌었다.
2023.08.19. 토요일
부다페스트, 비 온 뒤 갬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언니가 나간 틈에 울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오래했다. 저녁에 먹은 게 탈이 났다.
2023.08.20.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창밖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무한 반복했다. 결국 폭죽 놀이도 못 봤다. 처음부터 별로 갈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수 있지. 멍하니 누워 있다가 저녁에 조금 울었다. 마음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낮에 너무 오래 자서 새벽에 깨어있을까 무서워 테라플루를 먹고 다시 잤다. 내가 테라플루 먹는 이유를 언니가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일부턴 먹지 말아야겠다.
2023.08.21.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7시쯤 눈을 떴으나 회사에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허무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식탁을 겨우 치워 모니터를 놓는데 내가 그전에 어디에 모니터를 놓고 일했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침에 차분히 메일함을 보고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일을 버려뒀는지 실감하고 반성했다. 내 정신도 이렇게 해결 안 된 것 투성이에 마구 흐트러졌을까. 일 따위야 나 하나쯤 손 안 대도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굴러는 갔겠지만. 나한테는 나밖에 없을 텐데 어디쯤 굴러다니고 있을까.
정신없이 메일 정리하고 보내고 받고 하다 보니 오전 시간이 훅 갔다. 점심시간에 언니를 센텐드레에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땡볕인데 정말 대단하다.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센텐드레 다녀오는 길에 전화했다. 잘 지내냐는 말에 별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초지종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친구가 "야 너 또라이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깔깔 웃어 주어서 저번 주에 있던 일이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고 아직은 떠올리면 가슴이 쿵 떨어진다. 나는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런 일들에 조금만 더 의연해질 수는 없나. 지겹다. 지겹다...
서명해야 할 서류가 있어 저녁에 사무실에 갔다.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주차장에 차를 대고 40분을 누워있었다. ptsd라는 말 함부로 쓰고 싶지 않은데 내 방에 그게 생긴 듯 하다. 내 방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일 마치고 언니와 부다에서 만나 야경을 보았다. 사진 찍으러 명당 자리에 갔는데 어떤 한국인 여자가 거의 15분을 독점하고 앉아서 조금 짜증이 났다.
2023.08.22.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너무 덥다. 역대급으로 덥다. 새벽 세 시에 깼다가 다섯 시에 다시 잠들었다가 악몽을 꾸고 기분이 더러워서 깼다.
꿈자리가 사납더니 아침부터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옆에서 듣던 언니가 다 질려서 그냥 출근해버리라고 했다. 출근했는데 어른들이 걱정해 주셨다. 어디가 아프냐는 말에는 이젠 대답할 말이 빈곤할 정도다.
오후 내내 집중 못해서 저녁에 일했다. 아침에 일하다가 출근하고,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고 리들에서 삼겹살 사다가 언니랑 구워먹고. 일을 두 군데에서 하고 마트까지 다녀오니 하루가 유난히 복잡하게 느껴졌다. 리슬링 와인 하나를 땄다가 다 마셔버렸다.
2023.08.23.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숙취로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간만에 산책을 하고 싶어 나왔다. 달궈진 공기가 저녁에도 쉬이 가라앉지 않아 아침에나 산책할 수 있는 그런 날씨다. 피어있는 들꽃도 보고 낚시하는 사람을 한참 구경했다.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며칠 전 마셨던 맥도날드 롱 블랙 커피가 계속 생각나서 출근길에 들렀다. 여유있게 출근하니 좋았는데 주차장에서 사무실 잠깐 걸어가는 것도 더워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동료 직원과 덴마크 돈을 원화로 바꾸었다.
점심에 아이스크림 먹으러 나갔는데 12시 45분에 열겠다던 젤라또 가게가 50분이 되어도 주인이 나타날 기미가 안 보여서, 테스코에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줄줄 흐르고 난리가 났다. 잠깐 나갔다 왔는데도 기운이 다 빠졌다.
예약한 에어비앤비에서 확정을 안 해 주어 애가 탔는데 다행히 예약이 되었다. 내일이면 나름 긴 여행을 떠난다.
다음 주면 또 마감이라 고생할 팀원들을 일찍 집에 보냈다. 나도 누가 일찍 가라고 하면 맘 편히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 어릴 때 차장님이 OO 씨, 집에 가고 싶지? 하면 생각없이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잠시 짬을 내어 2~5월 사이 썼던 일기를 읽어 보았다. 거주증, 과중한 업무, 팀 운영 등 회사 일과 신변에 대해 고민했던 그때가... 너무 먼 옛날같아. 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지금 날 괴롭히는 이 마음도 언젠가는 식거나 해결되어, 나 왜 그랬나 몰라? 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당장 힘든 하루하루는 어쩌면 좋을까. 내 마음은 내 것인데 왜 주인인 내게 반기를 들고 괴롭히는가.
그래도 요즘은 많이 괜찮아졌다. 오늘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픈 노래 듣고 슬퍼지지도 않는다. 닳고 닳은 느낌이지만 어쨌든 당장 눈이라도 편안해서 좋다. 내일도 그럴 거고. 모레도. 계속 계속 괜찮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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