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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024 (20230810~20230816)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24 (20230810~20230816)

여해® 2023. 8. 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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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더위와 상사병, 회사 스트레스에 지쳐 블로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도 남는 것은 기록밖에 없는데 다 남겨놔야지.
 
헝가리의 여름은 원래 이렇게 아주 잠깐 반짝, 덥고 마는 것인지. 오늘은 해가 강한데도 가을 날씨다. 한국은 태풍이 온다는데 그러면 더위가 한풀 꺾이려나. 한국발 여러 가지 소식에 걱정스럽고도 질려서 오늘도 이 나라에 정을 붙여보려 노력한다.
 
어제 회사에서 큰 일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는 최초로 언성을 높이고 정말 개싸움이란 말밖에는 안 나오는 싸움을 했다. 회사에서 자꾸 밑바닥을 보이고 안 보이던 모습으로 살며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아침 내 친한 동생 왈, "언니 스스로를 잃어가는 게 아니고, 본모습이 나오는 거야. 나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란 말이야." 웃자고 하는 말인데 묘하게 힘이 되었다.
 
친한 언니가 한 달 정도 살러 와있다. 이번 주는 내가 바쁘니 영국으로 놀러를 갔다. 집에 혼자 있으려니 적적하고 막막해서 한 달 이후에는 어쩌지 싶지만. 원래도 혼자 잘 살았으니까 괜찮겠지.
 
전날 소주가 과하기도 했고 아침부터 여러 일이 있어, 임원분을 졸라서 점심에 진반점에서 짬뽕을 먹었다. 이 집 드디어 면 기계를 들여놓으셨나 맛있어져서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오고가는 대화가 내가 감당하기엔 무거워서 조금 힘들었다. 저녁에는 팀 회식을 하고.
 
내일은 내게 가장 숨막히는 업무의 마감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있는듯 또 없다. 이것만 마치면 한결 내 마음이 나을까.
 
정리되지 못한 관계로 상사병 걸린지 벌써 세 달째인가. 오늘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나한테 사랑받는 사람은 좋겠다고. 조건 없고,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나한테. 피를 나눈 가족도 아니고 돌아서면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저 좋다는 이유로 그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도 웃는 것도 좋고, 나 싫고 불편하다 하면 조용히 물러나줄 줄 아는 나한테.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내 자신을 더 사랑해야지.
 
 
 
2023.08.11.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날이 다시 더워지고 있다. 눈은 진작 떴지만 아침부터 눈물만 났다. 침대에 기대 앉아서 멍하니 창문을 보다가, 왜 안 오냐는 동료 문자에 몸을 일으켜 나갔다.
 
퇴근 시간 즈음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8시까지 아무 것도 손도 대지 못했다. 내일 나와야겠다 다짐하고 급한 불부터 껐다. 퇴근하니 11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2023.08.12.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고 오후에는 회사에 나와, 퇴사하겠다/계속 다니겠다 두 가지 내용의 편지를 각각 쓴 것 말고는 정말 일만 했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뭘 하니까 오히려 살 것 같았다.
 
언니 비행기가 무려 1시 30분 도착으로 미뤄졌다고 해서 오히려 느긋하게 일을 마무리 했다. 집에 와 누워서는 한참을 울었다.

공항 가는 길에 가로등 하나 없었다. 안 그래도 시린 눈이 더 힘들었다. 심야 운전은 할 게 못된다. 
 
 
 
2023.08.13.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요 며칠 사건 사고에 지쳐 밖에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언니가 심심해 하는 것 같아서 근교라도 가려고 발라톤으로 출발했다. 조금 늦게 출발했고, 또 갑작스럽게 연락을 했는데도 저번에 갔던 와이너리에서 흔쾌히 방문을 받아 주었다.
 


언니는 와인을 잘 먹지 못하는데 여기 와인은 정말 맛있다고 나름 과음했다. 이 가족들과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볼 때마다 여유가 넘치고 베풀 줄 아는 심성과 보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외모가 정말 부럽다. 마침 오늘 와이너리 곳곳에 그림과 조각을 놓고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헝가리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끝까지 남아 구경했다. 예쁜 풍경 보느라 잘 몰랐는데 또 더위를 먹고 말았다. 정신없어서 선글라스도 잃어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결심했다. 회사는 계속 다녀야겠다고. 집에서 혼자 와인을 먹는데 발밑에서부터 근육통이 뻐근하게 올라왔다. 약 먹기엔 늦었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2023.08.14.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온 몸이 아파서 일어나질 못했다. 회사에서 계속 전화가 오고 업무 처리를 하다가 그냥 나가야지 마음 먹고 몸을 일으켰다. 금요일보다는 회사에 일찍 도착했다.
 
써두었던 메일을 보냈고 점심에 한 차례 또 아팠다. 아픈 내 자신이 질리면서도 걱정스럽다. 저녁에 동료분이 집에 태워다 주셨고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밥을 먹고 테라플루 한 포 타서 먹고 잤다. 중간에 식은땀에 절어서 일어났는데 다행히 그대로 다시 잤다.
 
 
 
2023.08.15.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점심에 팀원과 Biang Bistro에 가서 마라탕면을 먹고 버블티를 사 마셨다. 두 곳 다 속이 터질 거 같게 답답하고 먹고나면 또 그냥 그저 그렇지만 왜 이렇게 한 번씩 세트로 구미를 당기는지 모르겠다. 덥고 택시가 시끄러워서 잘 먹고 와서는 날이 섰다. 가을이 오는 듯 하더니 왜 이렇게 또 더운지.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잃어버린 팔찌가 자꾸 생각이 나서 속상했는데 동생이 오늘 갑자기 찾았다며 사진을 보내 주었다. 금이 저렇게 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빛이 바래 처참했다. 물건을 험하게 쓰기도 하고 아무 데나 잘 팽개치는데 이정도로 팽개쳐두고 잃어버렸다 한 줄 몰랐다.
 
요즘은 꿈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한다. 허무맹랑해도 그게 현실보다 나으니 자꾸 잠만 자고 싶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자고 싶었다. 저녁에 잠깐 어지럽더니 무릎이 풀썩 꺾였다. 바닥이 카펫인데 살이 다 까졌다.

저녁에 동료와 회사에 남아 이야기를 했다. 집에 가니 언니가 밥을 해 주어서 잘 먹었다.



2023.08.16.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다가 소나기

점심에 진반점에서 동료 둘에게 밥을 사 주었다. 지난 번 쓰러졌을 때 도와 준 보답이다.

오후에 힘든 일이 있어 팀원들에게 법인카드 주어 나들이 보내고 조용히 울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우는 내가 질린다.

여기까지 와서 우울한 나 챙기느라 힘들 언니에게 미안해서 일을 끊고 나와 군델에 갔다. 실내 자리 앉았으면 좋았을 텐데 가든에 앉아서 보기엔 좋아도 모기에 잔뜩 물렸다.

웨이터도 자꾸 주문을 놓치거나 실수해서 기분이 안 좋을뻔 했는데 최고의 저녁이 되었다. 연주자가 와서 갑자기 신청곡을 묻기에 언니가 너 비발디 좋아하잖아, 힌트를 준 것. 겨울을 연주해 주었는데 누가 이렇게 날 위해 연주를 해준다는 게 고맙고 힘든 하루 다 보상 받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어서는 아리랑까지 연주해 주었다. 사연있는 사람처럼 울었다.

저녁먹고 집에 가는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우박까지 내렸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쫄딱 젖어 집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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