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04 (20221215~20221222) 본문
2022.12.15. 목요일
부다페스트, 비
너무 바쁘다. 정말 바쁘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여기저기 시달리다가 두시간쯤 야근하고 모든 걸 다 내일로 던지고 퇴근했다.
본부에 있는 과장님과 통화하다가 울어버렸다. 순간적으론 정말 못하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또 깊은 마음 속으로는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술을 줄이는 게 맞아서, 곱창볶음 남은 걸 먹으면서 술을 안 먹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겠지만, 나로서는 대단한 인내를 보인 것이다. 자정이 되기 전에 누웠고 금방 잠들었다.
2022.12.16. 금요일
부다페스트, 비
오늘은 크리스마스 파티(라고는 해도 나에겐 그저 회식)를 하는 날이다. 다들 차려입고 왔고, 내 스탭도 심지어 크리스마스 파티 위해서 옷이나 화장품 준비 좀 했냐고 묻기에, 멋쩍게 웃으면서 난 그런 거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터키 레스토랑에서 했는데 돈이 아주 적게 나왔다. 회식이니까 와인을 마셨는데 금방 취기가 올랐다. 럭키드로우에서 테스코 상품권을 받았는데 스탭에게 몰래 주었다. 고맙다고 카톡이 왔다. 자리가 일찍 파한 덕에 금방 집에 왔다.
2022.12.17. 토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하루종일 웹툰을 몰아 보고 이순신 장군 덕질만 했다. 후궁공략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의 웹툰인데 결말 10화 앞두고 끅끅 울면서 봤다. 원래도 나는 양자역학, 가상현실 이런 거에 매료되는데 이런 내용일 줄은 정말 몰랐다.
중간에 쫄면을 해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계란이 반숙인데도 잘 까져서 기분이 좋다.
친한 친구가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연말이 되면서 좋은 소식이 많다. 한 번도 밖에 나가질 않아 날씨가 어떤지 아예 알 수 없었다.
2022.12.18.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절에 다녀와서 alza에 들러 눈여겨 봐두었던 3in1 필립스 청소기를 샀다. 바로 픽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Sziget이라고 부다페스트 남쪽 끝에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기에 조금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alza에서 뭘 잘못 봤는지 빛 잔상이 심하게 남아서 운전하기 전에 조금 쉬었다. 오늘 간만에 해를 잔뜩 봤더니 눈이 적응을 못한 모양이다.
여차저차 픽업을 하고, 옆에 아주 크게 Auchan이 있길래 베이킹 재료들을 좀 샀다. 여기서도 그냥 일반 흰설탕을 볼 수가 없어서 여러가지로 검색해 봤는데 유럽은 설탕 대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황스럽다. 대신 본래 베이킹 용도는 아니지만 각설탕이 하나 남았길래 그걸 사고, cane sugar를 샀다.
마트에 갈때마다 설렘보다는 피곤함이 크다. 뭐가 어딨는지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많이 걸어야 하고, 또 글자마다 핸드폰 들이대면서 번역기로 뭘 보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가기만 하면 기본 한 시간이 걸리니까 각오하고 가야한다.
집에 와서 그냥 그대로 잘까 하다가, 삼겹살을 먹으러 비빔밥을 갔다. 양이 많이 줄었는지 배가 터질 거 같아서 구부정한 자세로 집에 겨우 왔다. 이제 비빔밥은 못 갈 것 같다. 1인분씩 파는 모임으로 가야지.
2022.12.19. 월요일
부다페스트, 눈
아침에 나올 때 보니 눈이 조금 쌓여있었다. 이제 헝가리도 조금씩 추우려나보다.
저녁 예약해둔 마사지 시간에 겨우 맞춰서 갔다. 매일 일을 미루고 저녁을 지켜보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회사 걱정으로 24시간이 꽉 찬 느낌이다.
밤에는 치즈케익을 만들었다. 넣고 섞고 공식만 지키면 완성되는 베이킹이 좋다. 오랜만에 만든데다 마스카포네 치즈를 만들어서 조금 망한 것 같지만 일단 밤새 식혔다.
자려고 누웠는데 염주 팔찌를 머리끈 대신 썼던 게 걸리적거려 풀다가 그만 끊어졌다. 할만큼 했으니 나는 간다 이건가. 산발적으로 흩어진데다 알이 작아서 찾아서 다시 꿰기는 어려울 듯 싶다.
2022.12.20.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일 끝나고 필라테스를 갔다. 이번에는 강도가 조금 더 셌다.
필라테스 끝나고 근처에 진반점이 있길래 갔다가, 옆 법인이 회식하는 것을 보고 계획을 바꾸어 포장만 했다. 운동해서 꼴이 말이 아니기도 했고, 고객사도 같이 있기에.
2022.12.21. 수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점심에 또 진반점에 갔다. 시내 운전은 처음이었는데 일자 주차 때문에 부장님이 밖에서 봐주시는데도 식은땀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Vaci Ut에서 유턴이나 좌회전을 못하고 쩔쩔맸다. 다시는 점심에 내 차 끌고 나가지는 못하겠다.
회계 법인에 직원을 시켜 선물을 보냈더니 고맙다고 전화가 왔다. 일전에 화낸 것도 보상할겸. 물론 내가 화낼만 하긴 했지만. 사람 미치게 했던 세무조사도 결국 잘 해결되었다.
저녁에 다른 필라테스에 가봤는데, 이쪽이 훨씬 호흡법을 잘 가르쳐 주어서 이쪽으로 다니게 될 것 같다. 선생님이 다소 예민해보이긴 하지만 나도 일할 땐 예민할 수 있기에 이해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케이마트에 갔는데 확실히 종류가 많았다. 산 것 중에 샘표 비빔국수가 가장 마음에 든다. 다음에 가면 잔뜩 사와야지.
폴란드 법인 친구의 친구 연락처를 급 받게 되어서 통화를 하다가, 결국 일 얘기로 넘어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웨스트엔드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쪽 역은 생긴 게 얼마나 복잡한지 건물을 앞에 두고도 한참 헤맸다. 어딘가에서 마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그냥 케익을 먹었다. 미리 생일 축하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하길 얼마나 잘했는지.
2022.12.22. 목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밤에 폭우
최악의 생일을 보냈다. 매년 내 생일은 이 모양이긴 했다. 아침에 드디어 집 인터넷을 고쳤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삼을 점이랄까.
회사에서 이렇게 주체 못하고 운 게 (비록 테라스에 나가서 울기는 했지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갓 대리 달았던 시절에나 일에 치여서 울었지. 사람들도 다 보기 싫고 다 질리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못 될 수가 있는지 싶고.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인데, 반차도 반납(?)하고 이게 뭐하는 짓일까 하면서 울었다. 너무 힘들었고... 과거형으로 끝내면 좋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한 것들이 날 덮칠까.
우리팀 직원은 책임감이 있는 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같이 야근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밤에 데려다 주겠다고 같이 주차장에 가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됐다. 생일 축하한다며 토카이 와인을 주고 갔다. 직원은 내일부터 휴가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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