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03 (20221208~20221214)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03 (20221208~20221214)

여해® 2022. 12. 1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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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목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전날 통화를 새벽까지 하다가 그만 세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하였다. 개인적인 일이 해결되니 회사 일이 머리가 아파와서 계속 고민이 되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답없는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옆팀 문제로 야근을 하다가 예약해두었던 마사지에 늦고 말았다. 급히 가다가 생각해보니 팁으로 줄 지폐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없이 동전으로 주면서 미안하다고 연신 굽신거렸다. 집에 와서는 피자 두 조각을 대충 데워서 먹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2022.12.09. 금요일
부다페스트, 비 많이 내림

아침에 집주인과 인터넷 기사가 방문하여서 두시간을 보고 갔지만 인터넷 해결을 못했다. 사실 당장 고쳐질 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회사는 바쁘게 돌아가고, 점심에 함바집에서 수육이 나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야근을 두시간 정도 하고 나와서 드디어 차를 끌고 집에 왔는데 주차장 입구를 못 찾아서 한시간을 헤맸다. 어둡고 비까지 와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머리가 나빠서 몸이 고생한다.

얼마전 연락처도 교환하고 차 한 잔 했던 헝가리인이 나에게 좋은 글이 있다고 링크를 보내왔는데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이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우연은 없는 걸까? 바로 차단했다. 길이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하고 친하게 지낸 외국인들이 생각났다. 내가 운이 얼마나 좋았던 건지.

누워서 배달 어플 wolt를 뒤적이다가 문득 얼마전만 해도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한가하게 굴 때마다 자길 잊지 말라는 듯이 꼭 떠오르곤 했던 그 일이 이제는 완전히 내게서 떠나간 것이다. 해결되면 후련할 줄 알았고, 굉장히 큰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이 살고 있다. 저녁에는 크나이프 소금을 풀어 목욕을 했다. 몸이 데워진 덕에 침대에 누워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2022.12.10. 토요일
부다페스트, 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날도 어둡겠다 길에서 우는 추태를 보일까 싶었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올해 버텨낸 일이 너무 많다.

오늘따라 헝가리 오기 전 여행갔던 한산도 생각이 많이 났다. 왜 외우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틀 뒤면 충무공 기일이다. 잠시 생각해봤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면서도 일기에 선조 욕 한 번 안 하셨다. 무슨 심정이었을까. 혹시 누구라도 일기를 보면 대역죄가 될 테니 애써 눌러 담았을까,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순응한 걸까. 왜놈이라는 적이 분명하게 있으니 거기 집중하셨을까. 충무공 기일에 따뜻한 쌀밥이라도 차려 먹고 싶다. 거의 매일 속이 안 좋다고 적은 일기를 보면서 맑은 고기국에 잘 지은 쌀밥을 해드리고 싶었다. 안 되면 막걸리라도 사와야지.

집에서 요리를 한 번도 안 해서 그런지 들어서면 커피 냄새만 가득하다. 좀 사람 사는 집 같아야 좋겠는데. 언젠가 정이 들겠지?





2022.12.11. 일요일
부다페스트, 눈, 비, 그리고 눈

헝가리 한인회 방에 눈이 온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혹시나 하고 창문을 열어봤지만 비만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점심을 넘겨서 막스마라 아울렛에 갔다. 유튜브를 해볼 요량으로 짐벌까지 들고 나갔는데 성가시기만 했다. 유튜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생각보다 매장은 정갈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었고, 거의 한시간 반을 들여서 추리고 추려내 바지, 니트, 신발을 샀다. 30만원 정도 나왔는데 굉장히 저렴하게 산 셈이다.

돌아가는 길에 이케아, 테스코를 들러 장을 보는데 기운이 다 빠졌다. 나중에는 눈앞이 흐릿할 정도로 혼이 빠져서... 낑낑대며 들고 가는데 도움 필요하냐고 현지인이 물어보았다. 내 덩치를 보면 도와줄 마음이 정말 들지 않을 것 같은데. 아직도 레이디 퍼스트 정신이나 이런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나 대중교통 타면 그냥 서있는 남자들의 매너가 적응 안 된다. 이게 익숙해지면 한국 가서 혼미하려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저녁에 뱅쇼를 끓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그만 다 마시고 말았다. 단 맛 나는 음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웬일이지 싶다. 계속 우리 집으로는 배달 안 해 주던 인도 레스토랑이 오늘은 배달 가능으로 열어놨길래 버터치킨과 비스마티 라이스를 시켰다. 친구에게 short noodles라고 말하며 웃던 밥이다. 굉장히 맛있었고 또 시켜먹고 싶지만, 언제 또 배달을 열어줄지. 반만 먹고 남겨두었다.


2022.12.12.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눈

 

아침에 몸이 안 좋아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시간 늦게 출근했는데 점심 대충 때우고, 저녁에 한시간 더 일했으니 쌤쌤인가 싶으면서도, 어쨌든 근태가 좋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속상하다. 체력을 좀 잘 보강해야겠다.

차를 끌지 않으려고 했는데 택시가 7~8분 뒤에나 온다고 하여, 그냥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어찌됐든 적응을 해야지. 운전때문에 하도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아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만. 점심에 보니 길이 얼어있었다. 헝가리의 겨울도 드디어 영하에 진입하였다.

점심은 테스코에서 케밥을 사봤는데, 먹을 때 굉장히 좋고 저렴했지만 (5천원 정도) 케밥 때문인지 히터 때문인지 몰라도 사무실에서 물을 엄청나게 마셨다. 주변에서 넌 물을 왜 그렇게 안 먹냐고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물먹는 하마가 됐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 기일이기 때문에 시내에 나가서 국물 있는 요리와 막걸리를 포장이라도 해올 생각이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날짜가 지나버렸지만 그래도.



국밥 파는 식당은 문을 닫아서 충무공 위해서는 막걸리를 사고, 날 위해서는 곱창을 샀다.한국에서 먹던 맛이랑은 다르지만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2022.12.13.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간만에 밝은 해가 낮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앞유리창이 어는 날씨이다. 점심은 테스코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점점 일과 회사내 입지가 나를 치고 올라오는데 모두 내가 잘할 거라고만 한다.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하면서. 언제적 얘긴가 싶은데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됐던 대리 시절이 그립다. 황송하고 부담스럽고 답답해 숨이 턱턱 막히지만 아닌 척 해 봤다. 낯을 너무 가리지만 대화에 능숙한 척 한다. 웃겨 죽겠네. 깜빡 정신을 놓으면 헛소릴 하거나 얼굴이 빨개진다. 나는 회사원이 정말 정말 체질에 안 맞다.

저녁에 안 그래도 소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옆 법인 법인장님이 먼저 제안해 주셨다. 안타깝게도 필라테스 예약해둔 것 때문에 고사하였다. 열심히 필라테스 가면 뭘하나? 술을 이렇게 먹는데.


필라테스는 재미있다. 초심자라서 살살 하는 걸까? 조금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헤이바오에 가서 김치볶음밥과 튀긴 만두를 포장했다.

집에서 어제 데워먹은 곱창볶음 냄새가 너무 나서 괴롭다. 커피 냄새 나서 사람 사는 느낌이 안 난다고 했나? 이렇게 며칠 사이 마음이 휙휙 뒤집히니까 한낱 인간인 거다. 주말에 원광사에 가기로 정안 스님과 약속을 잡아놨다. 헝가리에 조계종 사찰이라니 얼마나 재밌는 인연인가. 한치앞도 모르던 때에 갑자기 주어진 이 기회를 두고 만수사 대웅전에 갔었다. 부다페스트에 갈까요 말까요 같은 유치한 질문이나 하고 앉아있는데 Buddha페스트라는 말장난같은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다음날엔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때 내 마음을 괴롭히던 그 사건이 없었다면 더 기쁘게 떠나올 수 있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이렇게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어차피 인생은 미해결의 연속이다.

다시 난중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약속해 놓고 오지 않으니 한심스럽다'라는 구절에서 웃음이 나왔다. 내 쪽의 중압감이 훨씬 가볍지만, 충무공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구나 느낄 때 친근감이 든다. 위로가 되고.



2022.12.14. 수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오늘은 왠지 축축 처지는 날이었다. 생활 소음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감당 못할 경지까지 왔다는 뜻이다. 제일 먼저 위장이 뒤집히고, 그다음은 청각에 예민해지니까.

회사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다녀야 잘 다녔다고 소문이 날까.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다. 단순 업무만 하고 싶은데,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하고 다니고 싶은데, 상황이 허락하질 않는다. 그리고 점점 내가 돈을 충분히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있다. 불만이 하나둘씩 쌓여간다. 어서 해소해야 무난하게 살 수 있다.

점심에 드디어 voLTE 문제를 해결했다. 야근을 8시까지 하고 집에 돌아와 남은 버터치킨을 데워 먹었다. 아침에 이제 술은 덜 먹자고 다짐한 바 있어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다. 폴란드 사는 친구와 간만에 카톡으로 회사이야기를 했다. 드럼 세탁기 돌아가는 걸 한참동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asmr 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날이 많이 추워졌다. 내일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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