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51 (20240311~20240324) 본문
2024.03.11~2024.03.20. 이스탄불 여행, 한국 휴가 기간으로 여행기 별도로 작성.
2024.03.21. 목요일
인천->부다페스트
인천-프랑크푸르트-비엔나-부다페스트 미친 여정을 어찌어찌 소화하였다. 비엔나-부다페스트 경유시간이 너무 짧아 당연히 짐은 같이 안 왔다.
이상하게 비행기만 타면 나는 우울하고 답 없는 걱정과 생각을 많이 한다. 긴 시간 인터넷 없이 단절되어 있어 그러나 싶어 FlyNet까지 구매해서 카톡 신나게 쓰면서 왔는데도 그랬다. 그냥 습관인 듯. 이번 생각의 주제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정말 몇 번 못 뵐 것 같은 할아버지의 건강악화, 그리고 엄마아빠, 이모가 늙어간다는 것, 또 예전 같은 시절은 다신 안 온다는 그런 당연한 사실. 이번 휴가가 짧았던 만큼 한국에 갔다 온 것 자체가 실감이 안 나고, 인생도 돌아보면 여행처럼 짧다는데, 나 죽을 때 이처럼 허무할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
그 한정된 시간 속 나는 소중한 사람들 저 멀리 놔두고 혼자 뭐 한다고 여기 있는지. 그러나 내가 성격이 몹시 살가워 가까이 산다고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들이 몰려오고, 창문 통해 보이는 유럽대륙이 하나도 달갑지가 않아서 조금 울었다. 그래놓고 경유 때문에 눈물 대신 땀을 바가지로 흘렸지만.
2024.03.22.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새벽 5시에 잠깐 깼다가 '여기가 어디지?' 했다. 정말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사고가 흘러가지 않는 기분.
오늘까지가 휴가인 줄 알았으나 그냥 7시에 눈이 떠져서 나왔다. 안 나왔으면 큰일... 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애초에 21일까지로 휴가 냈던 것을 메일 뒤져보다가 알았다. 정신머리하고는...
오랜만에 나온 것 같지 않게 회사는 익숙하고 편안하다. 나 없는 동안 있던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냥 웃었는데 나는 이쯤 되면 그냥 회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제 비행기에서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줄줄 울던 내가 동일인 같지가 않다.
아침에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았는데 암표지자검사에서 또 알파태아성단백 수치가 양성으로 나왔다. 5년 전에도 그렇게 나와서 걱정스러웠는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진 않았고.. 나머지 또 안 좋게 나온 것들이 몇 개 있는데 생각보다 걱정이 많이 되거나 그렇진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점심에 테스코에 가서 정말정말 간만에 파스타를 먹었다. 꼭 이상한 게 시도해보고 싶어서 늘 먹던 것 안 먹고 이렇게 다른 걸 먹어보는데 이건 괜찮았다. 닭가슴살이 기름에 자글자글 구워져서 아주 맛있었다. 너무 짠 것 빼고.
다행히 어제 못 찾은 짐은 아침에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을 받았고 퇴근 후에 찾으러 갔다. 원래 집으로 받아도 되지만 얘네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그냥 다 믿음이 안 간다. 여기선 내가 발품 손품 파는 게 최고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타는 내 차에서.......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에어팟프로다. 미치겠다. 남동생한테 애플워치 대신 에어팟프로2를 선물로 받아왔는데.... 내 애플 워치........... 이걸 중고로 팔지, 아니면 혹시 모르니 여분으로 남겨둘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또 잃어버린 줄 알았던 톰과 제리 핸드폰 단자 마개도 배낭 바닥에서 찾았다. 수하물도 그렇고 오늘은 잃어버린 걸 되찾는 날인가.
집에 와서 냉동식품부터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안 가져온 것 같아서 아쉬움이 컸다. 쿠쿠는 상자 하나 안 찌그러지고 멀쩡히 잘 왔다. 2주 가까이 물 안 줘서 죽었겠지 포기했던 오렌지와 레몬은 다행히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확실히 우리 집은 햇빛이 덜 들어서 흙이 안 마른 것 같다.
2024.03.23. 토요일
부다페스트, 비 온 뒤 맑음
엄청 오래 잤다. 거의 13시간을 잤다. 친구 결혼식이라 동영상이 와있었다. 솔직히 한국 가기 전만 해도 기억하고 있다가 너무 정신이 없는 바람에 깜빡하고 있었는데 축의금만 보냈다. 이 친구도 되게 특이한 인연인데, 내 친구의 중학교 친구이고 같은 동네에서 어울리다 보니 그냥 내 친구가 됐다. 그렇게 친구 된 인연이 제법 있다.
오늘 밤에 잠을 못 자고 여전한 윗집 소리에 예민해질까 무섭기도 하고,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된 답 없는 질문 (가족 친구들 놔두고 내가 혼자 여기서 왜? 그렇다고 한국 가면 뭐 얼마나 잘한다고?)에 짓눌리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건강검진 결과가 조금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서.
원래는 15분 정도 땀나게 뛰고 걸으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인정하게 됐다. 좋든 싫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가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내 집임을. 어느새 미운정이 들었고, 착실하게 출근하고 퇴근하고, 퇴근 후에는 공부를 하든 취미생활을 하러 가든 이렇게 규칙적으로 살아온 것이 나를 버티게 한 힘이었음을.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리고 앞으로 훨씬 오래 살아있을 해를 보니 내 이까짓 고민은 다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러너스 하이다. 그래, 원래 3개월 이후의 일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는 거지 뭐.
운동 마치고 씻고 6시에 예약한 마사지를 갔다. 운동 직후에 마사지받는 게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지만 일단 받고 나니 거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옷 입고 나가서 Spar에서 장도 봤다.
한국에서 사 온 압력솥은 아주 마음에 든다. 쌀은 여전히 흐물흐물 퍼지려 하지만 압력 덕에 쫄깃함이 살아있다. 사 오길 정말 잘했다. 아, 이 사소하며 소중한 기쁨. 삼겹살, 팽이버섯, 김치를 구워서 저녁으로 한 그릇 뚝딱했다. 남은 와인을 마셔보려 했지만 잘 먹히질 않았다. 요리할 때 쓰기로 하였다.
2024.03.24.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다가 비
윗집 소란에도 그냥 잠들었다. 이제는 내가 예민한 건지, 쟤네가 심각한 소음 유발자인 건지 잘 모르겠다. 아침에 눈을 뜨니 7시 30분. 일요일에 너무 늦게 일어나면 기분이 아주 아주 아주 별로인데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전날 남긴 밥으로 간장계란밥을 해 먹었다. 되게 맛있고 든든했다.
밥 먹고 작년에 신입에게 얻은 깻잎 씨앗을 물에 불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꼭 잘 키워보리라. 어제 유튜브에서 봤는데 깻잎은 원래 일 년생이지만 꽃대가 올라올 때 그걸 제거해 주면 평생 먹을 수 있단다. 정말 그럴지 튼튼한 것을 골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사람 수명도 이렇게 영원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대충 커피 한 잔 때리다가 회사에 나왔다. 어제 나왔으면 좋았을걸.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있게. 하루만 더 쉬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 없이 뭐 진행되는 건 마음 불편하니까 나 혼자 쉬는 날 말고 그냥 다 같이 쉬는 날이었으면.
한 시간 정도 내 일 하다가 회사 일을 시작했는데 3시간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안 맞는 숫자를 찾아다니는 건 꽤 스트레스받는 일이지만 이젠 그냥 별 재미는 없고 중독성은 있는 게임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계속 혼자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조용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고 그걸 갖게 되었는데도.. 욕심은 끝이 없다.
차도 안 갖고 왔고 옷도 대충 입었는데 밖을 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또 그치겠지 하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다 되었다. 걷는데 처음엔 으슬으슬 춥더니 곧 몸에 열이 올라 더워졌다. 그대로 강 앞까지 가 운동을 한 시간 정도하고 집에 들어갔다.
내일 싸갈 유부초밥을 만들고 아침에 먹은 간장계란밥이 너무 맛있어서 남은 밥으로 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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