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48 (20240219~20240225) 본문
2024.02.19. 월요일
부다페스트, 흐리고 비
전날 술을 또 많이 먹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늘이 내내 어둡더니 오전에 비가 내렸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추워서 아주 오랜만에 히터를 틀었다.
이번 주 4일 연속 저녁 약속, 그것도 전부 회사 관련으로.... 잡힌 것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친구 하고도 이렇게 약속 잡히면 나는 숨이 막힌다. 공부시간 확보를 도무지 못할 것 같다. MA시험은 다음 주로 미루기로 하였다.
동생은 아랫집이랑 담배연기로 싸우고 있단다. 본인 말로는 층간소음보다도 더한 고통이라고. 그래서 땅을 사서 집을 짓겠다는데 옛날부터 한 번 한다면 하는 애라서 실없는 농담으로 들리지가 않는다. 나는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그때 집을 알아봐야겠다. 어제 잠시 ingatlan 둘러본 바에 의하면 같은 동네 다른 집도 큰 가격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저렴한 곳도 있다. 마침 집주인에게 메일도 왔다. 2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고 불평하는데, 혹시 들어봤느냐는 것이었다. 다섯 시 반쯤 되면 서럽고 크게 울부짖는 우리 옆집 개지, 뭐. 그러면서도 혹시나 내가 키우는 거라고 오해하는 건가 싶었다. 사람이 자꾸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 마음이 꼬이나 보다. 그나저나 그러면 토요일에 찾아온 사람은 윗집이 아니라 오히려 2층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누군가 초인종 누르면, 문만 살짝 열어봐야지 싶다.
저녁에 뉴욕카페에 갔다. 거기는 언제 가도 정신이 없다. 특히 입구쪽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식사는 맛있었지만 속이 느끼했다. 부사장님은 택시 먼저 태워드리고 신입과 둘이 비빔밥에 가서 비빔냉면을 먹었다. 욕심내서 곱배기를 시켰다가 많이 남겼다. 집에 가면서 내일이 느리게 오기를 빌었다. 부질없고,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도 그런 쓸 데 없는 걸 비는 마음을 모르겠다. 윗집은 계속 쿵쿵거리고 있다. 이젠 정말 다 포기하고 싶다.
2024.02.20.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악몽을 꾸고 6시에 깼다. 7시까지 비몽사몽 누워있었고 회사에 겨우 나왔다. 2024년부터 이민법이 전면 개정된다더니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 왔다. 오만가지 또 나한테 다 물어볼 것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이럴수록 공부하고 싶은 의지는 커져가는데 이번 주는 이미 포기해 놨어서 그런지 선뜻 공부에 손은 안 간다. 점심시간 이용해서 심리학 과제를 다 끝냈다. 브리타 저그에 아무도 물 안 채워놔서 내가 맨날 채우는데, 누가 뚜껑을 헐겁게 빼놨는지 잠깐 잘못 기울였다가 다 쏟았다. 정말........... 가끔 이렇게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입맛 없지만 KFC를 사다가 꾸역꾸역 다 먹었다.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 오후에는 결국 서류 정리가 되었다. 내가 서명해야 하는 서류가 생겼다.
저녁에 강식당에 갔다. 웃고 떠들고 그런 걸 못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참 묘했다. 집에는 일찍 들어왔지만 윗집 때문에 늦게 잠들었다.
오늘 일 계속 생각이 났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진 않았다. 더 독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
2024.02.21.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무슨 말을 할까. 이대로 괜찮을 줄 알았다. 심지어 마마스 가서 점심도 잘 먹었다.
집에 차 대고 간다는 핑계로 한 시간을 벌었다. 미디어마켓에 가서 줄 이어폰을 샀다. 메트로 타고 가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운 티를 낼 수가 없어 vaci ut 도로를 보면서 한참을 서있었다.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며 지나가는 생각이 내가 봐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도움 없이 이겨낼 수가 없을 것 같다.
회식 마치고 집에 가면서도 울었다. 2주 꾹 눌러 참은 게 결국 터져서 길인데 소리 내서 울었다.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너무 머리가 아프고 취해서 정신이 차려지질 않았다. 윗집이 쿵쿵거리길래 나도 그냥 미친 사람처럼 일정 간격으로 계속 천장을 쳤다.
2024.02.22. 목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신묘장구대다라니경, 관세음보살정근을 틀어두고 잤다. 그만큼 내 심정이 처절하다는 뜻이다. 꿈은 두 가지를 꿨다. 집에 가스버너마다 불이 다 켜져 있고 냄비가 시뻘겋게 익어서 물이 끓는 것이었다. 순간 내가 술 먹고 그래놨나 싶어 너무 무서워 깼다. 새벽 세 시인데 윗집이 뭘 바닥에 계속 던지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들었는데 회사였다. 이제 없는, 없을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이번엔 모두를 앞서 내가 그만두는 꿈이었다. 처음으로 회사에서 붙들지 않고, 어 그래 잘 됐다, 라는 얼굴로 날 보는 그런 꿈. 웃긴 건 그렇게 하고 나와서 제주도 담벼락 같은 길을 걸었다. 꼭 무슨 꽃길처럼, 큰 하귤이 탐스럽게 달린 나무들 아래를 걸어갔다. "저거는 크기만 크고 못 먹는 귤이래요" 하고 아는 체도 빠트리지 않았고. 좋아하는 요거트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어쩌면 꿈에서 말하는 메시지가 맞을지도 모른다. 쿨하게 떠나서 여기저기 아는 체나 하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일찍 나올 수 있었는데도 그냥 누워 있었다. 뭐 하러?라는 생각만 들어서. 집에 불이 나고 있던 꿈이 무서워 찾아보니 승진하고 어쩌고 하는 길몽이란다. 웃기고 있다.
이 모든 스트레스는 외부 환경에 의한 거니까, 거기에 대한 나의 반응일 뿐이니까, 내가 반응 안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곧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그냥 곧 가라앉고 만다. 이런 시기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도 꼭 무슨 어느 층 아래에 있는 것 같다. 물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생각들이 그냥 부유하다 사라진다. 그리고 나도 안다. 절대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요즘은 오랜만에 층간소음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윗집 몰아냈다, 복수했다, 윗집에서 미안하다고 빌러 왔다, 이런 글 올려놓은 걸 보는 게 꽤 큰 대리만족이 된다. 어느 정도냐면 그냥 그걸 읽다가 마음이 편안해져 잠이 올 정도로.
낮에 세종사이버대 지원 결과를 확인했는데... 세상에. 예비 9번. 너무 충격받았다. 대학 때도 안 받아본 예비......... 이게 뭐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잘 안 됐다. 도대체 왜? 등록금 때문에 조금 고민되긴 했어서.. 차라리 다행인가 싶다가도 왜? 경쟁률이 얼마나 세기에?
저녁에는 팀회식을 했다. 맛있긴 한데 발이 실시간으로 붓는 게 느껴질 정도로 염분이 많다. 와인은 쥐콩만큼 따라주고. 그래도 예산 이하로 나왔다.
부사장님께 드릴 축의금을 뽑았다. 오랜만에 패션스트리트를 걸어봤다. 집에 들어오면서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아예 끼고 잤다. 훨씬 평화로웠다.
2024.02.23. 금요일
부다페스트, 비
재무실적 보고가 있는 날인데 전년도 파일도 다 맞춰봐야 해서 하루 종일 할 각오로 나왔다. 요즘은 자꾸 일찍 일어나도 멍하니 '가기 싫다..'라는 생각을 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만다. 비가 많이 내려서 회사 앞 거리에 차를 대놓고 일단 뛰어들어왔다.
점심에 계속 생각만 하던 쌀국수를 시켰다. 젓가락도 안 오고, 빼달라던 고수와 오이는 버젓이 들어있고, 무엇보다 국물이 뜨겁지 않고..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신 안 시켜 먹으련다. 싼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이번 주 스트레스가 확 올라가면서 다시 식비 지출이 올라가고 있다. 그래도 저번 달에 비하면 정말 선방했다. 택시도 두 번밖에 안 탔고.
재무실적 보고를 마치니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오랜만에 점심시간까지 이용해 풀 집중 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이번 주는 걱정한 대로 흘러갔고, 모든 일이 내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잘 넘겼다. 다음 주는 부디 제발 평안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2024.02.24. 토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새벽까지 윗집 쿵쿵대는 소리에 나중에는 환청인지 낮은 음역대의 음악소리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웃긴 건 이렇게 일기에 매일 적을 정도로 심각하지만 스트레스받는 강도는 점점 무뎌져간다. 잘 잤고 10시에 일어났다. 잠이야 잘 잔다 쳐도 이런 시끄러운 환경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국 휴가 다녀오고 나면 이 집에서 이사 나가야겠단 생각을 하니 한결 편해진 듯하다.
어제 만든 김치볶음밥이 매우 맛있는데 양도 많이 해놔서 아주 든든하다. 회사에 도시락으로 가져가려고, 또 남은 건 아예 얼리려고 각각 플라스틱 통에 담아놨다.
누워서 열흘 치 가계부를 정리했다. 확실히 입력 건수 자체가 적고 간결했다. 월급 빼곤 모두 비용항목이니 지출이 줄었다는 뜻이다. 식비는 지난달 대비 거의 70%를 줄였다. 회식하느라 회사 주차장에 차 놔두고 가서 다음날 아침 택시 타는 것만 안 하면 되지 싶다.
부동산 친화적인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니 또 이 팔랑귀는 요즘 부동산이 갖고 싶다. 빨리 대출 갚아서 내 집 지분이나 높여야 하는데. 진작 이렇게 투자에 맛 들렸으면 지금쯤 회사 일로 절절매지 않았으려나. 그러나 지난 세월은 논해봐야 의미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강가를 걸었다. K마트까지 가는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많은 생각이 찾아왔지만 걸으면서 드는 생각은 또 금방 날아간다.
마트에서 사 온 연겨자분을 넣어 돼지갈비를 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진 않아서 좋았다. 조금 구워서 와인이랑 먹었다.
2024.02.25. 일요일
부디페스트, 맑음
소파에서 잠들었다. 대형 선박만 한 곰 혹은 바다괴물한테 쫓기는 꿈을 꾸었는데 은근히 재미있었다. 찾아보니 뭐에 쫓기는 꿈은 흉몽이란다. 그러든지 말든지.
커피를 마시는데 목이 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다시 내 남자의 여자를 정주행중인데, 당당히 이혼 후 든든한 친정, 돈 많고 내 편인 시가 서포트 받아가며 샌드위치 가게 하는 배종옥이 왜 부러운지 모르겠다. 결혼도 안 한 내게 이혼은 더더욱 나랑 거리가 먼 얘기니 그냥 판타지 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본다.
저녁에 갑자기 치즈케익이 먹고 싶어 재료를 사다가 구웠다. 오븐이 영 맘에 안 드는 게 어디다 놔둬도 크랙이 생긴다. 물론 장인은 도구탓을 하면 안 되는데 나는 장인이 아니니까 탓해도 된다. 아직 덜 냉장된 상태에서 살짝 먹어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회사에 가져가기로 하였다.
'일상, 삶 > 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중일기 050 (20240304~20240310) (3) | 2024.03.12 |
---|---|
난중일기 049 (20240226~20240303) (3) | 2024.03.04 |
난중일기 047 (20240212~20240218) (2) | 2024.02.19 |
난중일기 046 (20240205~20240211) (0) | 2024.02.13 |
난중일기 045 (20240129~20240204) (0) | 2024.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