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49 (20240226~20240303) 본문
2024.02.26.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은 듯 흐린 듯
아침에 돼지갈비 얼린 것이랑 치즈케익을 들고 회사에 왔다. 귀찮아서 또 길에 차를 대고 그냥 올라왔다.
아침에 직원들 먹으라고 부엌에 케익을 놔두었는데 금방 동이 났다. 맛있어서 먹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먹어보라고 웃는 낯으로 권해서 억지로 먹는 건지, 남 입맛이야 난 몰라도 내 입맛에는 조금 아쉬웠다. 재료가 간단하고 정직하니 맛이 없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 만든 게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어쩌고저쩌고 하다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일찍 나왔다. 부사장님을 KHAN에서 만났다.
점심 먹고 나서 자동차 검사하러 서비스센터에 갔다. 원래 뽑은지 1년 or 15,000km 중 먼저 도달하는 시기마다 해야하는 의무 검사로, 내 차는 15,000km는 아직 안 되었지만 뽑은지 1년이 넘어서 검사 시기를 놓친 셈이다. 다행히 별 말 없이 넘어갔고, 시간은 한 시간 걸렸다. 또 잠깐 비운 사이에 온갖... 짜치는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 서둘러 돌아왔다. 오늘 와인 학교 가서 결제하기로 했는데 또 까먹었네.
전쟁 같은 한 주를 보내느라 놓고 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꾸역꾸역 자리에 앉아 펼쳤다. 집중이 어쩌면 이렇게 안 될까. 고등학생 땐 어떻게 했던 걸까. 공부가 팔자에 없는데 내가 뭐 어쩌자고 이걸 시작했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2024.02.27.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새벽에 세종사이버대에서 전화가 왔다. 예비합격 9번이라서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합격을 했다. 카드로 등록금 결제를 하는데 세 번이나 튕겨서 괜히 잠이 다 깼다. 다 하고 나니 새벽 네 시였다.
아침에 생리통으로 일어나질 못했다. 뻐근하고 내리찍는 것 같은 피곤함이 계속 됐다. 사실 일어나려면 일어났겠지만 그러기 싫었다. 너무 노곤했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일어났다.
퇴근하는데 옆팀 대리님이 좋은 옷 입고 다니신다고 했다. 네? 하고 물어보니 얼마 전에 판도르프에서 산 버버리 트렌치다.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했다. 또 그냥 다 내다 버리고 싶어졌다. 나는 왜 이다지도 남의 주목과 관심을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는가.
바이올린 수업은 드디어 재미있어졌다. 활을 켜면 아주 가냘프고 애처로운 소리가 난다. 내 손 힘이 딸려서인 것 같다. 그게 자꾸 신경 쓰이고 생각이 나고... 꼭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런다. 나는 내가 바이올린을 몹시 좋아할 사람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비싼 바이올린을 사고 싶어 진다. 아. 안 돼....
집에 와서 드디어 갈비를 구워 먹었다. 숙성시키니 더 맛있어졌다. 그러나 뭔가 끝에 내 마음에 안 드는 맛이 나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계속 입맛 다시면서 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소믈리에 납셨네 싶고 꼴값 같아서 그만두었다.
자기 전에 조금씩 스키마 테라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 얘기 같은 부분은 날카롭고 괴로워서 나도 모르게 잠시 잠시 멈추며 본다. 그래도 하나씩 내 우울감의 원인을 찾아가는 기분. 어디서나 특이하다던 나는 사실 특별할 게 없고 정형화된 인간 군상 중 하나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타고난 기질이 다 다르다는 말도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꼭 공부 머리는 99% 타고나는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에 대해 반쯤 맘 편하게 포기하고 시작하는 것처럼.
2024.02.28.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새벽에 또 깼다. 자면서 더웠는지 가운도 다 벗어던지고.. 이제 슬슬 이불을 바꾸고 잠옷도 여름 전용을 입어야 할 때가 왔다. 오늘 꿈은 할아버지가 내가 끓인 된장찌개를 먹고 싶어 한다는 내용만 기억에 남는다. 된장찌개...? 난 여태껏 살면서 끓여보긴커녕 먹어본 적도 별로 없다. 참으로 뜬금없는 내용이다.
주차장 자리를 또 뭐 복잡하게 어쩌라고 연락이 왔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그냥 걸어서 회사에 왔다. 오랜만에 걸으니까 기분도 좋고. 요즘 차가 점점 많아지고 운전이 많이 거칠어져서 그 짧은 거리 운전에도 스트레스받는 참이었다. 날씨 풀렸으니 이젠 종종 걸어 다녀야지.
아침에 컴퓨터 켜자마자 신나게 세종사이버대 로그인해서 학생증 신청부터 했다. 다시 대학생(?)이라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다. 대학 때도 이렇게 신나진 않았던 것 같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으므로 점심은 튀김우동 작은 컵을 먹었다. 슬슬 더워져서 어디 나가기도 귀찮고. 작아서 먹기도 싫다 할 땐 언제고 또 이게 딱 양이 맞다.
주말부터 새끼손가락이 왜 자꾸 아픈지 모르겠는데 갈수록 타자도 치기 어렵게 아프다. shift, ctrl 키를 누를 때 쓰느라 제일 많이 쓰는 손가락인데 너무 성가시다. 요즘 타자를 너무 쳤나?
내일은 듄 파트 2를 보러 가는 날이다. 어른 영화의 영어... 알아들을 수 있을까. 웡카도 어려웠던 내 수준에는.... 한 60% 알아들으면 다행일 수준일 것 같다. 동생 놈이 웬일로 용아맥 예매를 시도해 준다고 하는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2024.02.29.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우울해졌다.
저녁에 듄을 보러 갔다. 예상대로 60% 정도만 알아들었다.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나는 야무지게 살지 못하는지. 내 집은 왜 엉망이며 나는 왜 내 건강 관리를 안 하고 이렇게 내버려두는지.
2024.03.01. 금요일
부다페스트, 비 오고 흐림
한국 휴가 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 현실 감각이 없이 멍하다. 이스탄불에서 뭐 할지 아무 생각도 못해놨다. 괜히 4일이나 머무르게 일정을 짰나. 그래도 이스탄불이 생각보다 너무너무 마음에 들지도 모르는 거고. 저번에 소개팅(?) 했던 분이 한국 가는 걸 기억해주고 계시다가 가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여 내일 집으로 초대하였다. 열심히 집을 치워야겠다.
2월 한 달 동안 엄마한테 짜준 포트폴리오에서 난 수익을 보고했다. 엄마가 만족스럽다고 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가계부 정산도 해보니 식비 지출을 정말 많이 줄여서 그것도 기분 좋고.
오늘 드디어 블루카드 결정서를 받았다. 기간은 고작 내년 3월까지라 짧지만 그래도 드디어 한 발짝 뗀 것이다. ChatGPT며 뭐며 온갖 것을 다 뒤져서 거주증 어떻게 신청하는지 공부했다. 회사에서 내야 하는 서류도 전부 파악했다. 이제 답답하고 무책임한 남의 손에 맡길 필요가 없을지도. 그렇게 관여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국 밀물처럼 내게 다 밀려올 것임을.
저녁에 마사지받을 생각만 하면서 오후를 버텼다. 바쁜데 이상하게 시간이 더 더디게 가는 기분이 들었다.
2024.03.02. 토요일
부다페스트, 비
집에 손님 초대하느라 아침부터 청소하고 장 보러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많이 먹었다.
2024.03.03.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한국 휴가 전 마지막 휴일인데 누워만 있었다. 이스탄불 관광지를 찾아보다가 너무 귀찮아서 그냥 프라이빗 투어를 찾아보고 결제했다.
집에만 있던 게 못내 답답해 날씨를 확인하고 애플워치를 충전시켜 나왔다. 남쪽 하늘에 모래시계 모양의 오리온자리가 선명히 보였다. 이젠 정말로 봄이다. 이런 작은 것 하나로 나는 또 세상에 감사한다.
이번에도 한국에 가면 많이 바쁠 것이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 앞에서 잘 사는 사람 행세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겉만 보면 자유롭고 여유 있는 인생. 가끔은 죄책감이 든다.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몇 달 전과 비교하면 나는 꽤 잘 살고 있다. 이젠 시커먼 강물을 봐도 아무렇지 않고 내 마음을 남에게 저당 잡히지도 않는다. 층간소음에 분노하고 회사에서 하루하루 빡칠지언정 하루 지나면 다 잊는다. 그런 것들보다 내게 중요한 일이 많이 생긴 덕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지금의 내 일기를 보며 또 한 번 놀랄 날이 오겠지. 이때 내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그걸 잘 이겨내 지금의 내가 있는 거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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