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73 (20240819~20240825) 본문
2024.08.20. 화요일
포드고리차->부다페스트, 맑음
새벽에 몇 번이나 깼다. 이불과 가운이 너무 무거워서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랫동안 연락 못하고 지낸 친구에게 보낸 카톡에 무슨 일 있냐는 답장이 와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굳이 따지면 아무 일이 없어서 문제인 거지. 새벽 네 시부터 일곱 시까지 계속 핸드폰만 봤다.
어제는 사우나, 수영장에서 4시간이나 있었고 오늘 아침에도 사우나를 가려 했지만 조식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식당이 도떼기 시장 같아서 오믈렛이나 대충 먹은 후 라운지로 올라와 한참동안 커피를 마셨다.
이 무기력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여행밖에는 아는 해결 방법이 없는데. 우선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곳이고 당장 그만 둘 계획도 없으니 돈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단순화하니까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면대 앞에서 양치를 하는데 발등 위로 물이 자꾸 똑똑 떨어지는 느낌에 보니 아래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2024.08.21.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새벽 네 시, 다섯 시, 여섯 시에 한 번씩 깼다. 자다 일어났는데 바로 출근할 시간이면 그게 더 싫어 이 편이 더 좋긴 하지만.. 왜 이렇게 자주 깨는지 조금 염려된다.
아침 기온을 확인하니 22도로 확 떨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은 내일이 처서다.
어제 결심했던 대로 얼마를 얼마동안 모을 건지 계산을 해보았다.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친구가 "괜찮아 그냥 해 쓰는 거 줄일 생각 말고 깊이 생각하지 말고" 라고 말해 줘서 고마웠다. 친구가 내 인생 책임져 줄 거 아니지만 그냥 나를 오래, 잘 아는 타인이 해주는 말에 기대게 될 때가 있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욕심을 내지 말고 완벽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해 보자. 이렇게 하루하루 스스로 한심해하며 힘들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날 필요로 하는 직장이 아직 있고. 아직 해 볼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적어도 3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 인생을 동경했었다.
2주 동안 손도 안 댔던 영양제를 챙겨먹었고, 구석에 박아뒀던 애플워치도 충전기에 올려놓고 나왔다.
퇴근 후 승마장에 다녀왔다. 맨 처음에 가르쳐 줬던 선생님이랑 했고 훨씬 호흡이 잘 맞았다. 수업을 마친 후 당근이 없어 풀을 뜯어 말에게 주었다. 다음엔 당근을 좀 사가야겠다.
2024.08.22. 목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새벽에 팔이 너무 가려워 깼다. 모기인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불안했다. 헝가리에 베드버그가 있다는 말은 못들어 봤지만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와서 더 신경이 쓰인다.
한국에 휴가 다녀오신 부장님과 아침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블루카드 관련해서 업체와 통화를 했다. 모든 일이 다 깔짝깔짝 반만 걸쳐서 해결되는 기분이라 답답하지만, 속도를 낼 급한 사정도 없으니 나도 좀 느긋하게 살아야겠다.
점심시간에 우체국에 가서 EMS 하나 보내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내 서툰 헝가리어를 귀엽게 봐주고, 우편 용지도 한 움큼 쥐여주는 고마운 할머니 직원이라 짜증은 안 났다. 그냥... EMS를 보내는 내 사정이 미안할뿐. 아파트가 선도지구가 될 수 있게끔 동의서를 보내달라고 해외에 있는 나한테까지 어찌나 연락이 오는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 일을 중단하고 나왔다. 내일 아침 두 시간.. 충분하고 여유 있지만 시간에 쫓기는 그 기분이 너무 싫어서 미리 마치고 싶었는데.
저녁 약속은 실외에 자리를 잡았다가 벌이 너무 꼬여서 실내로 옮겼다. 바이오 사우나처럼 은은하게 더운 실내에서 밥을 먹었다. 이제 이 정도 더위는 그냥 익숙하다.
집에 돌아와 청소를 두 시간 넘게 했다.
2024.08.23.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잠깐 흐리더니 해가 쨍쨍하다. 점심시간에 테스코에 가서 돈을 뽑는데 그 잠깐 걷는 사이 햇빛에 그야말로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쯤.. 언제쯤 비라도 와줄까. 일요일에 야외 수영장이라도 가 볼까. 연속된 저녁 약속, 휴가 등 어쩌다 보니 수영 안 간 지 2주나 됐다. 다음 주는 꼭 가야지 했는데 벌써 자리가 다 찼다. 참 먹고 살기 빡세네.
부장님이 한국에서 사온 거라고 숙취해소제를 주셨다. 이거 먹을 정도로 술 먹는 일.. 없어야겠지만, 멀미나서 어지러울 때 먹는 약도 같이 들어있어서 뭔가 안심이 되었다.
몬테네그로 여행 망친 게 두고두고 억울한 거 정상일까. 돈도 돈인데 시간이 너무 아깝다. 이미 지난 일 생각해봐야 뭐하겠냐만, 그래도 다시 갈 일 없게 배웠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하.. 조금도 안 돼.
2024.08.24.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약속이 있어 시내까지 나갔다. 원래 가려던 가게는 테이크아웃 전문이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크로크무슈같은 토스트를 생각했는데 햄치즈 샌드위치라고 나온 게 현지인들이 집에서 만들어갖고 와서 기차에서 자주 먹는 그런 비주얼이었다.
브런치 가게 근처에 Bortarsasag 체인이 있길래 가서 Boko David 레드와인을 두 병 샀다. 하나는 오늘 대리님네 가서 먹을 것이고, 하나는 내 거.
네스프레소까지 간 김에 오랜만에 Biang Bistro에 갔다. 브런치 먹은게 너무 부실하기도 했고 안 먹은지도 오래 되어. 와인 수업 마지막날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막 공사를 마친 모양이다. 에어컨도 생겼고 실내가 훨씬 깔끔해졌다. 대신 곱창국수에 이상한 토핑이 많아지고... 단무지가 국물에 들어있는 게 싫어서 빼달라고 하니 요청은 잘 들어 주었다. 칭따오 한 병이랑 먹으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K마트까지 걸어가 장을 봐서 집에 오는데 정말 이젠 덥다는 말도 안 나오고... 집에 두 시간을 뻗어있었다. 닌텐도, TV 독을 바리바리 챙겨서 대리님네 가서 자정까지 놀았다. 부부 둘 다 젤다를 너무 재밌게 하기에 실컷 하라고 닌텐도는 두고 나왔다.
2024.08.25.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야외 수영장에 다녀왔다. 웰니스, 선베드 티켓까지 추가하니 한국 돈으로 거의 3만원이나 나왔다.
물 반 사람 반 (사람이 더 많을지도..) 수준의 온천 풀장은 물마저 더러웠다. 주말이고 애매한 시간인데도 수영장 앞 주차장이 빽빽하게 차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진짜 후회되었다. 핀란드식 사우나도 자리가 없어서 만원 전철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거나 서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50m 수영장에 가니 그나마 아이들도 없고 수영을 할만해 보였다. 체력이 얼마나 안 되는지 왕복 한 번 하고 쉬고, 한 번 하고 쉬고. 큰일이다 진짜.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드러누워 뭘 먹고 마시고 애들 뛰어놀고 하는 걸 보다보니 드는 기시감.. 뭐지 뭐지 했는데 옛날에 갔던 청학풀장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밖에 나가서 먹거리를 거의 안 사주는 사람이고, 엄마 친구네랑 가면 아줌마가 진짜 이것저것 엄청 많이 잘도 사주셔서 그게 그렇게 큰 행복이었다. 찾아보니 문 닫은지는 5년이 지났다는데, 5년 전까지 운영을 했다는 거 자체가 신기하다. 사진으로 다시 보니 어릴 땐 그렇게 커 보였던 풀장이 그냥 동네 물놀이장 수준으로 보였다.
의외로 진짜 맛있었던 망고 아이스크림은 나오면서 한 번 더 사먹었다. 젤리인지 과육인지 뭐가 들어있어 씹는 맛이 좋았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보니 선크림을 꼼꼼히 안 바른 얼굴 가장자리가 또 벌겋게 익어있었다. 이럴 가치가 있었나... 한 번 가본 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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