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스페인 마요르카, 인생의 목표를 만들어준 소중한 2박 3일 본문
헝가리에 돌아가면 거주증이 나오기까지 이제 꼼짝없이 헝가리에만 있어야 하는 신세다. 독일이 다른 건 몰라도 위치는 참 다른 나라 여행하기에 훌륭해서, 여기 지내는 동안 주말마다 룩셈부르크, 프랑스 등등 여기저기 잘 다녔다. 그냥 가기 아쉬우니 마지막 주말에 어디라도 가자, 하고 스카이스캐너에 목적지 Everywhere를 쓰고 검색해 봤는데 거기서 제일 싼 가격으로 비행기표 있는 게 마요르카 팔마.
나는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을 좋아하는데 거기서나 보던 이름이다. 마요르카보다는 팔마라는 항구 이름이 더 익숙한 것도 게임 덕택. 아무튼 정말 저렴한 비행기표 때문에 선택한 이곳이 내게 인생의 목표가 될 줄은.
스페인의 남쪽에 있는 마요르카는 약간 우리나라의 제주도같은 섬? 유럽 사람들이 휴양하러 많이들 간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런 얘기 들을 때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시끌벅적한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을 선호하는 나는 (물론, 홍콩은 제외) 지도를 켜서 바닷가에, 음식점이나 바가 적은 마을을 골랐다. 그렇게 고른 Alcudia라는 조용한 마을. 방 하나짜리 아파트먼트를 빌렸는데, 가서 보니 아파트먼트가 아니라 완전히 고급 빌라였다. 집주인이 무슨 취미로 렌트를 주나 싶을 정도로 125유로에는 너무나 과분하게 잘 갖춰진 집.
독일에서 마요르카 팔마를 가는 방법은 프랑크푸르트 한 공항을 통하는 것인데 이게 진짜 어이가 없다. 프랑크푸르트 한 공항은 프랑크푸르트랑 하나도 상관이 없는데다 약 두 시간을 운전해야만 갈 수 있는 허허벌판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공항이 너무너무 작다보니 취항하는 항공사도 라이언에어같은 작은 항공사뿐.
그간 적립된 연차를 다 써버려서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해서 일요일 도착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는데,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양해를 구하고 한시간 일찍 출발했다. 가는 길에 어찌나 공사가 많은지 그 시속 60으로 속터지게 15분을 가고 아우토반을 달리고 하면서 두시간만에 공항 도착.
어릴 때 탔던 라이언에어 여전히 공포스러운지 기대하면서 탔는데, 쌩으로 저렇게 비행기까지 걸어가라고 한 것 빼고는 나름 괜찮은 비행이었다.
세 시 퇴근 후 아무것도 못먹고 달려온지라 라자냐도 시켜서 먹었다. 9유로? 맛은.. 없었다.
마요르카 공항에 내려서 렌터카 셔틀을 기다리는데 조금 불쾌한 일이 있었다. 나 말고 동양인 무리가 또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나만 쏙 빼놓고 (심지어 내가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자리가 다 찼다며 홀랑 가버린 것. 15분을 더 기다려 다음 셔틀을 탈 수 있었는데, 이때만 해도 만사가 피곤하고 내가 지금 겨우 내일 하루 놀자고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빌린 차는 르노 클리오. 소위 말하는 깡통차만 타본 나는 시동이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모르게 조용하고 스마트한 클리오에게 반해버렸다. 헝가리에서 쓸 차로 옵션 때문에 폭스바겐을 버리고 토요타를 선택한 내 결정에 조금 더 확신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숙소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네비는 45분, 나는 50분 걸렸다.
숙소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 넘어있었고 집주인은 나를 기다리다 지쳐서 화분 아래에 열쇠를 놓고는 방탈출 게임처럼 이런저런 지령을 주었다. 진짜 말그대로 dog피곤해서 난 왜 이런 뻘짓을 하는가 한탄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운전하면서 하늘에 뭐가 반짝반짝 해서 설마 저게 별인가 했는데 정말 별이! 쏟아지게! 많았다. 몽골 테를지 초원에서 본 것보다 더. 거기에 싸아아 싸아아 하는 파도소리가 얼마나 가까이 들리는지. 피로가 싹 가시면서 군침이 싹 돌았고 (?).
라자냐가 매우 맛없었고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뭔가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근처에 테이크아웃 할만한 가게를 찾아보니 Planet Burger라는 곳이 평이 괜찮았다. 10분정도 또 운전을 해서 테이크아웃을 해오는데, 대마초 냄새인지 진짜 희한한 냄새가 엄청 나고 젊은이들이 많았다. 늙고 초라하며 조용한 게 좋은 나는 바에 매달리듯이 바짝 달라붙어서 조용히 햄버거와 맥주 두 병을 사서 나왔다.
계란이 들어간다고 하면 나는 약간 반숙같은 걸 기대했는데 그게 조금 아쉬웠지만 맛은 매우 훌륭. 패티에 파가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은근히 한국스러운 맛이 났다.
다음날 아침. 정말 비명 질렀지. 너무너무 너무너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난 꼭 저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을 거야. 비장한 각오로, 씻지도 않고, 원피스 위에 후드 하나 뒤집어 쓰고 (걷다가 더워서 벗어버림) 가까운 항구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본 말 많은 고양이. 진짜 내가 아는 고양이 중에 제일 말이 많았다. 나중에 집앞까지 따라왔는데 먹을 걸 원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그냥 너무 심심하고 정이 많은 스타일인듯.
걸어서 25분이라길래 어느정도 각오는 했지만, 지중해의 해는 아침 열시에도 뜨거웠다. 그리고 막상 도착하니 그 동네 최고 평점 베이커리에는 이미 크로와상이 다 팔리고 없었다. 지난 주에 프랑스에서 크로와상 매진 돼서 못먹고 온 기억이 있는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요. 근처 이름없는 가게에 들어가서 크로와상 하나와 커피를 샀다.
전날 주유소 편의점에서 산 오렌지주스 (사실 와인 사려고 들어갔는데 12시 넘어서는 술을 안 판댄다) 까지 야무지게 세팅을 하고 사진 찍고 인스타에 자랑하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엄마아빠한테는 왠지 혼자 너무 좋은 데 와있으니까 미안해서 조금만 자랑하고. 먹는데... 솔직히 크로와상 별로 맛없었다. 커피도.
그래도 뷰가 좋으니까. 너무 행복해서 계속 앉아있다가. 한량처럼 누워있다가 일어났다가 그러다가.. 시간이 훌쩍 갔다. 진짜 바다만 봤는데 다른 거 안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갈 수가 있나.
슬슬 배고파져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마요르카에는 조개가 싱싱하고 싸다고 하기에 직접 조개술찜을 해먹으려고 장보러 나갔다.
마트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복잡했고 재밌었다. 오렌지 주스는 저렇게 병을 끼워놓고 직접 착즙한 뒤에 용량만큼 계산하는 건데, 내 눈으로 오렌지만 들어가는 걸 분명 봤는데 맛은 진짜 설탕을 찐하게 탄 맛이었다. 오렌지가 그만큼 달다는 거겠지?
한끼 해먹을 거 치고는 좀 투머치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다 필요한 재료인걸 어떡해. 다 먹고 칼국수...를 대신해줄 탈리아텔레 파스타도 샀다.
조개는 아무래도 와인이랑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술찜에 들어갈 요리용 와인, 내가 먹을 소비뇽 블랑 와인 이렇게 두 개를 샀고. 저녁까지 기다리기엔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동네 맛집에서 삶은 문어 애피타이저를 구입했다.
아니 마요르카는 뿔뽀(문어) 요리가 맛있다며.. 뭔가 너무 씹는 맛이 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한산도에서 먹었던 그 꼬들한 돌문어 숙회가 얼마나 생각이 나던지.
저녁에 먹을 조개술찜 재료 손질 타임. 통마늘을 네 개나 까고 (이거 맨손으로 깠다가 이 글 쓰는 지금까지도 손끝에서 마늘 냄새 나고 아림....) 홍합 수염 뜯고 조개 껍질 미친듯이 씻었는데... 하다보니까 또 현타. 내가 이걸 지금 뭐하자고 하는가. 근데 버터를 녹이고 마늘 넣자마자 그 생각이 싹 가셨다.
조개를 너무 많이 샀다. 맛조개나 홍합 둘 중 하나만 샀어야 해. 씹는 맛은 맛조개가 더 나았고 홍합 덕분에 국물이 엄청 시원했다. 파스타까지 삶아 먹으니 진짜 여기가 천국이구나. 내가 조개를 정말 질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인데 정말 조개들한테 미안하지만 조금 남기고 말았다.
여담으로, 이 숙소 윗층에 머물고 있는 어떤 중년의 여성을 주차장에서 마주쳤는데, 나한테 집 빌려준 호스트인줄 알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가 이어진 대화가 정말 놀라웠다. 회사를 운영하다가 팔고, 집은 독일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는데 여기는 겨울에만 지내고 있다는 것. 나에게 이것저것 묻더니 회사를 하나 다시 차리려는데 혹시 모르니 내 연락처를 받고 싶다며 번호를 교환해 갔는데, 혹시 사기일까 싶어 구글에 검색을 해보니 그 분 얼굴과 이름이 뜨는데 신문사 사장이었다. 맙소사.
아마도 그리고 나도 목표가 생겼다. 여기에 꼭 저 사람처럼 별장을 갖는 것으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일출을 기다렸지만, 해는 산 너머로 떴다. 일출은 역시 정동진이 찐이다.
2박 3일 진짜 너무너무 짧았지만 난 나중에 여기서 살 테니까 지금은 짧아도 괜찮아. 이렇게 말하면 난 꼭 이뤄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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