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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021 (20230515~20230521)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21 (20230515~20230521)

여해® 2023. 5. 2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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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월요일
부다페스트, 비
 
아빠는 몸이 안 좋아 못 움직인다고 하여 엄마와 둘이서만 새벽에 비엔나로 출발하였다. 10분 정도 연착되었고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헤매고 맥모닝 먹고나니 만날 시간이 다 되었다.
 
아무 기대없이 신청한 투어였는데 가이드 분이 요목조목 잘 짚어 주고 즐겁게 해 주셔서 엄마도 나도 재미있었다.


특히 클림트의 키스를 실물로, 그것도 사람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느긋하게 봐서 좋았다.

다만 10시에 시작해서 14시에 끝난 투어 후에 너무 지쳐서, 이후에 패기있게 예약해둔 쇤부른 궁전 입장권은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 시내에서 멀기도 멀고, 일단 뭐가 더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는데 어찌저찌 다 보긴 했다. 하지만 왜 비엔나에 가면 필수로 봐야하는 곳이라는지는 의문이다.
 
원래는 공연까지 보고 밤 늦게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그 기차표는 그냥 날려버리고 7시쯤 기차를 탔다. 전날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오늘 무리해서인지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았다.
 
 
 
2023.05.16. 화요일
부다페스트, 비
 
역시나 징조가 좋지 않더라니만 새벽에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저번에 응급실 실려간 적도 있고 이래저래 걱정이 됐다. 해열제 먹으니까 다행히 열은 내려서 점심에 예약해둔 Comme Chez Soi에 갔다.
 
그런데 웬걸, 평일 낮인데도 주변에 주차할 곳을 찾을 수가 없고, 설상가상 늦을 거라고 전화하니까 우리 이름으로 된 예약이 없단다. 두달 전부터 예약해둔 건데 하도 미리부터 해놓으니 예약 관리가 안 된 모양이었다. 혹시나 내가 착각했나 싶어서 메일을 찾아봤는데 떡하니 5월 16일 12시라고 보내놨던데.
 
실망을 안고 예전에 괜찮게 먹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리조또와 파스타를 먹었다. 엄마도 맘에 들어했고, 이후에는 그레이트 마켓 홀에 가서 역시나 주차 자리 못 찾고 뺑뺑 돌다가 포기하고 싶어질 때쯤 한 자리를 찾아서 겨우 들어갔다. 나도 여기 살면서 처음 가본 곳인데 예상처럼 별로 볼 것은 없었다. 윗층 기념품 파는 곳에서 엄마가 열심히 수집중인 자석만 하나 사고, 아랫층에서는 채소와 과일을 조금 샀다.
 
컬리플라워 스프랑 스테이크를 해먹으려고 Auchan에서 장을 봐왔는데... 내가 잘못 구운 탓도 있겠지만 한시간의 요리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정말 맛이 더럽게 없었다. 하긴 웬만한 식당에 가도 턱이 빠질 것 같이 질긴 고기이니까. 다시는 집에서 해먹지 않으리라.
 

부다페스트 야경 볼 기회는 오늘뿐인 것 같아서 밤 10시 넘어서 차를 끌고 명당 자리로 갔다. 한국 사람, 미국 사람 투어로 많이들 온 것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2023.05.17. 수요일
크르크, 맑음
 
일찍 출발한다 해놓고 어찌저찌 결국 열한시에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패기있게 출발했는데 가는 길이 정말 너무 험난했다. 크로아티아 들어서고도 한참 달리는 동안 비가 막 쏟아지다가 긴 터널을 지나 크르크섬으로 들어오니 바로 쨍쨍한 지중해의 햇빛이 비치는 것이 아주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숙소를 찾느라 좀 많이 헤맸고, 늘 Waze를 애용했는데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실망했다. 아무리 기술 발전이 되어있어도 초행길은 늘 고된 법인가.
 


숙소 잡은 동네가 지나치게 조용하고 아무 것도 없어서 짐을 풀면서도 좀 우울한 기분이었다. 혼자 다닐 땐 정말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데, 오히려 엄마아빠랑 같이 오니 떠들썩하니 을왕리 해변처럼 정신없더라도 인기 많고 사람 많은 휴양지 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래도 숙소 근처 식당이 아주 멋있었고, 지중해 바다는 고요하고 깨끗했다.
 
 
 
2023.05.18. 목요일
크르크, 맑음
 
섬에서 별 할 일도 없고, 엄마가 계속 플리트비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플리트비체에 갔다. 키로수가 얼마 안 돼서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이놈의 Waze가 또 (이젠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고 있음) 무슨 짓을 해가지고는, 산골 마을로 뺑뺑이를 돌렸다. 헝가리에서 1년치 비넷 사놓고 크로아티아에서 톨게이트 오랜만에 보니 돈이 아깝다고 생각을 했는데 고속도로가 눈물나게 그리웠다.
 
힘들고 신경써야 하는 건 둘째치고 산골 마을 돌아돌아 가는 동안 바로 밑이 절벽 낭떠러지인데 안전 가드 하나 없고 맞은편에서 큰 트럭이 올 때는 정말 눈앞이 아득하고 힘들었다. 특히 플리트비체 바로 위에 있는 마을에서, 차마 엄마아빠도 사진 찍을 겨를 없이 무서운 그런 곳이었는데, 플리트비체로 떨어지는 폭포 한가운데 썩은 다리를 길이랍시고 건너랄 땐 진짜 가슴이 철렁했다.
 


모든 게 다 후회스럽고 다신 크로아티아 안 온다 할 때는 순간이었고, 플리트비체는 소문대로 정말 장관이었다. 게다가 관광버스 줄줄이 와있는 걸 보니 그 산골마을 타고 온 것 같지는 않아서, 네비게이션 말 듣지 않고 돌아 돌아 가니까 다행히 편안하고 안전한 길만 나왔다.
 
크르크섬 도착해서는 섬 초입에 있는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봤는데, 헝가리 몇개월 살면서도 못 느껴본 한류의 힘을 느꼈다. 한국말 할 줄 아는 어린 직원도 있고, 모두가 친절한데다 물가도 헝가리보다 저렴한 것 같아서 신나게 돈을 썼다. 전날 식당에서 먹은 크르크섬 와인도 괜찮아서 두 병 샀고.
 
숙소 근처는 정말 마땅히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전날 갔던 식당에 또 갔다. 다 맛있었던 전날 음식과 다르게 조금 불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래서 엄마아빠 잠든 사이에 혼자 숙소에서 라면 끓여 먹었다.
 
 
 
2023.05.19.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체크아웃이 10시인 걸 모르고 늦게까지 자다가 산책 나간 엄마아빠를 불러서 부랴부랴 겨우 제시간에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자그레브를 들르네, 발라톤 호수를 들르네 하다가 그래도 헝가리 내에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냥 발라톤 호수의 티허니로 갔다. 예전에 갔을 땐 몰랐는데 카 페리를 태우길래 섬인가 했는데 그냥 최단 거리를 알려준 것이었다.
 


을씨년스럽던 늦겨울과 달리 물 색깔도 예쁘고, 특히 티허니에서 그나마 맛집이라고 알려진 Echo 레스토랑에서 엄마아빠가 굴라쉬와 슈니첼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굴라쉬는 취향도 아니고 더운데 국물 먹기 싫어서 입에도 안 댔는데 이 글 쓰는 지금은 한 입이라도 먹어볼걸 조금 후회가 된다.
 
부다페스트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하니 어쩔 수 없이 탁 놓이는 마음. 벌써 지겹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도시인데, 또 은근히 길들여졌었나보다. 다음날이면 엄마아빠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친 체력인데 저녁에 또 나갔다. 이슈트반 성당 야경을 못 보여줬기 때문에. 내가 헝가리 들어온 첫날 저녁에 갔던 곳이고, 또 거기서 마신 카푸치노 한 잔이 아주 인상깊게 남아서 함께하려 갔다. 나 혼자였으면 여기 사는 내내 안 가봤을 장미 젤라또 아이스크림집에 줄 서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파리에서 먹어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발적으로 줄 서서 먹을 맛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간에 너무너무 힘들어서 골드핑거에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엄마아빠는 둘이서 버거킹(을 도대체 왜..) 갔다가 Platz에서 맥주도 한 잔하고 하다가 나중에 합류하였다.
 
 
 
 
2023.05.20.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엄마아빠 돌아가는 비행기가 저녁 8시쯤이라 시간 여유가 많았다. 어제부터 해가 쨍쨍하길래 양산을 챙겨들고 나갔는데 이거 없었으면 나는 죽었다. 중간 중간 잔디밭에 땡볕 쐬며 누워있는 현지인들이 존경스러웠다.
 
아빠가 아파서 못가본 그레이트 마켓홀을 한 번 더 가고, 내가 몇 년 전에 쓰다가 버린 프라다 지갑을 주워 쓰고 있는 엄마가 마음이 아파 루이비통 가서 지갑 하나 사주고 (전세계에서 제일 싼 루이비통이래 하면서 근거없는 말을 했는데 정말 싼 건지는 모르겠다), 더글라스에 가서 유명하다는 자도르 비누도 선물용으로 좀 사고, 강 앞에 있는 노천 카페에서 식사하고, 또 부다성과 어부의 요새를 가고. 그렇게 해서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갈 시간.
 
부다페스트 공항, 특히 2B는 진짜 조막만해서 출국 게이트인지도 모르고 들어갈뻔한 정도였다. 한시간도 안 되는 시간, 딱 하나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들어가라고 하는데 다행히 엄마아빠 앞에선 울지 않았지만 게이트 넘어가서 더이상 안 보이게 되자 눈물이 났다.

사실 약 8개월만에 보는 얼굴이라 처음 봤을 땐 그대로네 했지만, 여행 다니면서 엄마아빠 체력이 예전같지 않은 것, 또 가끔 주름진 얼굴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나 되겠냐는 엄마 말에 코웃음 치곤 했었는데 정말로 이젠 실감이 난다.  내가 여기서 사는 한 일 년 중에 한 달도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다. 나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지. 가족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들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와 닿았다.
 
공항 주차료 비싸다는 말은 들었지만 뭐 얼마나 비싸겠어 했는데 8800 포린트가 나왔다. 세상에. 
 
집에 와서 엄마아빠가 사다 준 진공포장 순대를 뜯어 백순대를 해먹었다. 생각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2023.05.21.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엄마아빠 있는 내내 늦게 일어나봤자 8~9시에 눈을 떴는데, 오늘은 진짜 어깨가 아프도록 옆으로 누워서 12시까지 잤다. 친구하고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다시 한 번 회사원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했다. 친구는 벌써 차곡차곡 자기 길을 잘 찾아 나가고 있다.

하루종일 집에 앉아있다 누워있다 반복했다. 9시도 은 돼서 일찍 누웠는데 결국 열두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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