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12 (20230220~20230226) 본문

일상, 삶/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난중일기 012 (20230220~20230226)

여해® 2023. 2. 27.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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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0 월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잠을 하나도 못 잤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이 다 떨어져간다. 넉넉히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상자에 8알이래봤자 하루치도 안 된다.
 
저녁에 회사 주임이 여러가지 물품, 귤, 음료수, 약을 전해 주고 갔다.
 
 
2023.02.21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숨이 턱턱 막혔다. 괜찮다 싶으면 약기운이고, 네 시간이면 어김없이 약기운이 떨어져 오한이 들었다. 숨이 자꾸 차오르니 폐렴일까 걱정돼서 병원에 가봐야겠다 싶은데, 찾아보니 희망적인 정보가 나오질 않았다. 코로나면 사립병원에서 안 받아주고, 공립병원 (우리 직원이 말했던 그 공포의... 공립병원..) 가야 한다는 그런 내용들.
 
결국 앰뷸런스를 불러야만 응급실에 갈 수 있다고 하여, 앰뷸런스를 불러서 병원에 다녀왔다.
 
공립 병원에서는 아무 처방도 받지 못했고 사립병원 예약을 했다.
 
 
 
2023.02.22 수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새벽 내내 몸부림칠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게 끝날까 그런 생각만 계속 들었다. 동생이 결국 엄마아빠에게 내가 아프다는 걸 말했다고 한다.
 
점심에 회사 주임들이 집에 찾아와 가습기를 전해주고 갔다. 네 개 남은 타이레놀도 가습기에 붙여가지고 왔는데, 한국 약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는 지 알기에 정말 그 마음이 고마웠다. 고롱 고롱 숨소리에 자꾸만 깨는 선잠을 몇 시간 자고 7시에 예약해둔 사립 클리닉에 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약처방 팍팍 해줄 것 같은 의사를 만나니 마음이 놓였다. 청진기로 숨소리를 듣더니 숨 끝에 가랑가랑한다고, 천식이 있는지 묻고는 기관지염 처방을 해주었다. 벤토린과 항생제. 드디어.. 병원 로비에 자판기가 있었는데 핫초코가 왜그렇게 먹고 싶은지, 평소 먹지도 않는걸 엄청 맛있게 먹었다. 
 
식욕이 좀 돌아서 근처에 나눔이 있길래 떡볶이를 포장해왔다.
 
몸이 다 지치고 힘들어서 집에 와서는 널브러져 있다가 떡볶이를 겨우 먹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매운 음식이라 아프기만 했는데, 그래도 뭔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새벽까지 전혀 잠을 못 잤고, 친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친구가 너무 놀랐는지... 차마 할말이 없다고, 한국에 돌아와도 괜찮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항생제 때문인지 나잘 스프레이 때문인지, 깊은 속까지 바짝 바짝 물이 마르는 느낌이라 힘들었다. 기침을 할 때 허리에 잘못 힘이 들어갔는지, 오른쪽 뒷허리가 땡기고 아팠다. 
 
 
 
 
2023.02.23 목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계속 잠을 못자다가 새벽 다섯시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한시간 간격으로 깨다가 나중에는 또 선잠 든 상태로 계속 누워만 있었다. 냄새가 아예 느껴지지 않다가 이제 조금씩 나기 시작하는데, 방에서 불쾌한 병원 냄새같은 게 났다. 아프다고 아픈 냄새가 날 수 있는 걸까. 시트부터 죄다 빨고 싶었지만 그럼 누울 곳이 없기에... 나아지면 청소하기로 하고 놔뒀다.
 
메일 몇 개 확인하고 답장하고 하다가 치킨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딜 나갈 기력이 안 나서 집에 있던 냉동만두를 튀겼다. 즐겨 먹던 건데도 맛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에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이대로 죽어도 되겠다 싶었다. 잠 못자는 고문을 당한지 며칠째인지. 이렇게 금방 나락으로 가는 내 정신력이 한스럽고, 늙고 병든 내 몸이 아쉽다. 제발 잠 좀 자게 해주세요. 우영우에서 봤던 것처럼 시험삼아 관세음보살을 소리내서 말해보기도 했다. 우연인지 뭔지, 기절하듯 잠들었다.
 
 
 
 
2023.02.24 금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원래는 너무 아파서 한밤중에도 일어나서 이부프로펜 한알이라도 먹어야 깼는데, 한번도 깨지 않았다. 일어나서도 통증도 딱히 없고, 약 기운이 떨어져도 열도 안 나고, 가래도 거의 안 나오고. 확실히 항생제 약발이 강한 듯 하다. 아무 냄새도 못맡아서 일주일 내내 손도 안 댔던 커피도 한잔 즐겨보고, 오랜만에 회사 일로 열도 내보고 하니 이제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한달 동안 너무 잘해주고 많이 도와준 주임이 이제 본부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녁에 잠깐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아직은 무리였나 싶었다. 그래도 벤토린도 있고, 반가운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2023.02.25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간만에 푹 자고 일어나 비빔국수를 끓이고 있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 한시간동안 통화를 했다. 회사 아닌 다른 얘기를 하니 기분전환도 되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그립기도 했다.

본부로 돌아가는 주임을 공항에 데려다 주고, 다른 주임을 저녁에 초대해서 삼겹살을 먹었다. 간만에 술도 조금 마셨는데 아주 꿀맛이었다. 많이 취한 것 같아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와 또 푹 잤다. 푹 잘 수 있는 일상을 되찾아 기쁘다.




2023.02.26 일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이번 주에 입국한 신입 친구를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


아직 입맛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는지 많이 남겼다. 브런치 먹고 나서는 시내 atm기에 함께 가주고, 미술관을 들러 전시도 구경했다. 고작 네시간 나가있었는데 완전히 녹초가 돼서 누웠다. 약 다섯시간 정도 불멸의 이순신을 복습했다.

요즘에는 ‘이순신의 나라’라는 소설을 틈틈이 읽고 있는데, 이걸 읽다가 갑자기 금신전선 상유십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아서 울었다.

고작 잠을 못 잔다는 이유로, 숨을 못쉰다는 이유로 무너지고 죽고싶다 생각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6개월 내내 회사에 시달려, 지난 내 선택까지 모조리 후회되어서 더 나약해진 걸지도 모른다. 사실 다 놔버리고 싶었는데.. 나에겐 열두척의 배는 없지만, 다시 멀쩡해진 육신이 남아있으니 일어서야겠다. 내가 이순신 장군같은 영웅이 될 수도, 될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은 닮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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