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11 (20230213~20230219) 본문
2023.02.13.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간만에 날이 갰다. 날씨는 좋은데 거주증 관련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동생 결혼식 못 본 것도 속상하고 이거저거 몰려와서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이 나라 들어와서 신고식을 너무 거하게 치르는 느낌이다.
저녁에는 한국관에 가서 육회, 삼겹살 배부르게 먹고 직원 머무르는 숙소에 가서 2차로 한 잔 더 했다. 나초를 시켜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2023.02.14.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비몽사몽으로 택시를 탔다가 거기서 안경을 잃어버린 것 같다. 본사에 보고해야 하는 자료가 아주 많았는데 흐린눈으로 일하려니 힘들었다. 안경 하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마지막 남은 여분이었는데... 어쩌지.
점심에 마리나파트에 있는 요트클럽 겸 식당에 가서 파스타를 먹었다. 평일 낮인데도 여유롭게 식당에서, 강변에서, 공원에서 시간 보내는 사람이 많아서 부러웠다.
본사 패키지 보고해야해서 늦게까지 야근했다. 진도식당 양념치킨이 맛있다는 말에 포장을 해와서 우리팀 직원과 함께 먹었다. 감기 기운이 슬슬 도지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2023.02.15.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세시간밖에 못 잤는데 아침에 생각보다 쉽게 눈이 떠졌다. 그런데 감기기운이 심하게 들어서 힘들었다.
저녁에 상사분과 함께 했는데 또 회사 내에 무슨 흐름이 바뀌었구나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더 다닐 맛이 나지 않았다.
2023.02.16.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이민국에 가야해서 그런지 잠을 설쳤다. 수면 무호흡 증상이 또 시작되는 거 같았고 몸살이 엄청 났다. 이민국에서는 내 신청 케이스가 이미 취소되었다고 하여 임시거주증도 받지 못했고, 우연히 변호사를 만나 따져 물었더니 내 거주증 케이스에 대해서 자기가 얘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믿음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취소된 서류를 받아 번역기를 돌려 읽어보니 거주증 유형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건 승인이 되었어도 문제였겠구나 싶었다. 변호사에게는 더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하도 어이가 없는 와중에 더 황당한 소리를 회사에서 들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은 건 맞지만, 이렇게 나를 자주 울게 하는 회사가 앞으로 막막해졌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정치질에, 수시로 바뀌는 기류에. 이대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픈데 꾹 참고 일을 마치고, 저녁에 혼밥하려고 예약해둔 식당에 가려는데 주임이 걱정되었는지 같이 따라왔다. 마음은 한결 나아졌는데, 집에 와서 누우니 몸살기운이 너무 심했다.
2023.02.17. 금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아침에 출근하지 못했다. 계속 무호흡증인지 기침인지 때문에 잠에 완전히 들지 못하고 병든 닭처럼 졸았다. 누가 못 자게 자꾸 나를 깨우는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냥 죽고싶어졌다.
거실에 약이 있는데 한 번 걷기도 힘들어서 한시간을 숨을 골라쉬다가 약을 겨우 먹고, 저녁에 겨우 정신을 차려 열을 재보니 38도가 넘었다. 아세트아미노펜을 한 번에 400mg만 먹다가 1,000mg으로 늘렸다. 열이 내려갔다. 하루에 4천을 넘기면 안 되니 얼마나 먹을 수 있지? 이런 걱정을 하면서 계속 잠에 들려다 깨고, 또 깨고 했다. 자세를 몇 번을 고쳐 누워도 계속 내가 코고는 소리 혹은 기침 때문에 화들짝 하며 깼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 잠들게 해주세요 제발. 하면서 눈을 감았다. 안 자도 괜찮다, 괜찮다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새벽에 까무룩 잠들었다.
2023.02.18.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누가 문고리 잡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띵동띵동 하길래 나가보니 밖에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뭐지. 신경쓰기도 귀찮을 만큼 온몸이 피곤했다.
아침에 약먹고 나니 기운이 좀 돌아서 거지꼴이 된 집을 조금 치우고, 식기세척기 돌리고, 세탁기도 돌리고.. 원래 오늘 승마를 같이 하러 가기로 했던 주임을 저녁에 초대했다. 김치가 하나도 없고 삼겹살도 애매하게 남아서 그냥 차를 끌고 부다까지 다녀왔다. 중간에 약기운이 떨어졌는지 다시 힘들었다. 해외에서 아픈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완전히 혼자 남았다는 느낌. 운전하면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회사원을 정말 하면 안 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이야 못하지 않겠지만... 회사는 애초에 일 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다.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뭘 하며 살아가야 할까. 마트 주차장에서 갑자기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면서 내가 외국에 있다는 게 또 한 번 실감났다. 나 여기서 뭐하는 걸까. 여기에 툭 떨어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봐도 답은 없다.
얼마전에 내가 그동안 쓴 일기를 다시 다 읽어봤는데 지난 일들이 참 재밌고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지금의 내 모습도 나중엔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된다.
2023.02.19. 일요일
부다페스트, 날씨 모름
하루종일 앓다가 Wolt에서 코로나 키트를 시켜 해보니 희미하게 두 줄이 나왔다. 즉시 회사에 병가를 냈다. 잠을 전혀 못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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