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86 (20241209-20241215) 본문
2024.12.09. 월요일
부다페스트, 비
이제야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후회는 없지만 그동안 무리한 일정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작년에 사서 열심히 입은 COS 코트는 이제 버려야겠다. 무거워도 너무 무겁다. 친한 언니가 예전에 겨울옷은 무거워서 몸이 힘들다, 겨울옷은 반찬냄새가 더 잘 밴다, 하면서 겨울이 싫은 이유를 늘어놓을 때는 이해가 안 됐던 게 딱 30대 후반이 되면서 와닿는다. 색이 마음에 안 들어 안 입고 있던 캐시미어 코트를 꺼내, 거의 반년만에 택을 뜯었다. 하필 새 옷을 입는 날 비가 내린다.
나라가 불안정하니 지금까지처럼 전부 한국 계좌로 송금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IBKR 계좌에 유로를 바꿔 갖고 있을지 고민이 된다. 아마 다음 월급부터는 한국으로 최소한만 송금하지 싶다.
엄마는 한국 가자마자 연락이 별로 없다. 야속하다. 누가 날 협박해서 여기 있는 것도 아닌데..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괜히 부럽다. 개인적으로는 딱히 나쁜 일도 없는데 기분이 우중충하다. 날씨 때문이다.
양파를 30분 동안 버터에 볶고 고체카레와 우유를 넣어 새우카레를 하였다. 너무 맛있어서 긴 요리 시간이 허무하지 않았다. 우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EBS 다큐멘터리를 봤다. 자본주의는 의자 앉기 게임. 직관적 비유가 바로 이해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본주의는 치사하고 잔인하고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공산주의의 폐해는 회사생활하며 이미 잘 겪어 왔으니.
막걸리가 잘 됐을까 마음이 계속 쓰여 결국 한 입 맛을 보았다. 놀랍도록 맛있었다.
2024.12.10. 화요일
부다페스트, 비
COS 코트 버린대 놓고 또 입고 왔다. 새로 산 코트는 너무 거창하고 너무 분홍색이어서 도무지 손이 안 간다.
원래 오늘이 팀회식 날이었는데 도수치료 예약해 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캘린더를 싹 한 번 다시 정리했다.
2024.12.11. 수요일
부다페스트, 비
계속 비가 오니까 우울한 기분이 든다. 신입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여 보여주었는데, 내 얘기도 들어있어 기분이 나빠야 마땅했으나 그냥 그런 거 상관없이 너무 웃겨서 간만에 정말 크게 웃었다.

저녁에 회식하러 나눔에 갔다. 부장님도 우연히 같은 가게에서 마주쳤다. 사장님께 막걸리 담근 것 한 병과 가루 키트를 전해드렸다. 좋아하시는 건지 아닌 건지 표정이 늘 잔잔한 포커페이스이신지라.. 모르겠다. 그래도 음식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한테 제일 반가운 선물이지 않을까. 먹고 나서 아주 맛있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또 배 터지게 먹고 나와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한 번 둘러보았다. 펜팔 친구인 교수님에게 엽서와 함께 뭐라도 곁들여 보내고 싶었는데 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밀라노에서 사야겠다. 뱅쇼도 사 먹었다.
2024.12.12.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두꺼운 니트를 입고 왔더니 방이 또 온실이다. 내가 이런 온실에 너무 계속 있어서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간만에 보는 해가 반갑다. 곧 저게 너무 싫어지는 날이 오겠지. 그러다 보면 다시 한국 휴가 갈 시간이 될 것이고. 그때는 한 살 더 먹어있을 것이고.
생일날 뭘 할까 생각해보고 있다. 친구는 그날 돌아갈 것이고, 그럼 공항 데려다주고 시간이 얼마나 남으려나. 저녁에 마사지나 받으면서 쉴까 보다.
펜팔 교수님이 mbti 얘기를 하셔서 당연히 인프피라고 쓰다가.. 아니지, 혹시 모르지, 하고 다시 검사를 해봤다. 세상에. 재작년, 작년에 이어 또 T가 나왔다. 회사가 한 사람 체질도 성질도 바꿔버리는구나.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간만에 야근을 했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프다. 그래봤자 고작 7시에 마친 것이다. 옛날엔 어떻게 일했는지 모르겠다... 퇴근길에 본부장님과 마주쳐 비명을 질렀다. 내가 질러놓고도 왜 질렀는지 모르겠음. 집에 와서 냉동시켜뒀던 엽떡을 먹었다. 막걸리는 도수가 거의 없는 듯하다. EBS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돈은 알면 알수록 괘씸한 존재다. 그러나 돈이 있어야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게 그토록 어려웠다는 헤세는 적어도 경제적으로 자유로웠을 것이다.
2024.12.13. 금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엽떡의 여파로.... 화장실에서 일어나지 못해 지각했다. 다신 평일에 먹지 말아야지.
관심도 없던 아이돌이 꿈에 나온 것이 자존심 상한다. 아침에 부장님과 티타임 중에 두나 아레나에서 큰 수영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본의 아니게 칼퇴해야 하는 사정이 되어 정신없이 일했다. 올해는 TP와 CbCR 때문에 조금 긴장된다. 하인즈에서 두 번 해본 기억이 어렴풋이 날뿐.
매일유업 관련 기사를 보았다. 전체 비중에서 2% 정도 들어가 있는 종목이다. 그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도 믿고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고. 역시 투자에는 감정을 담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순간 눈앞이 아찔한 것은 내 계좌 때문이 아니라 엄마한테 사두라고 했는지 애매한 기억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만 망하면 되는 일이었다.
2024.12.14-15. 토-일
밀라노 여행기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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