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58 (20240506~20240512) 본문
2024.05.06. 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날씨가 선선해졌다. 저녁에 두나판다에 가서 고구마를 사고 근처에서 훠궈를 먹었다. 도로 생긴 것도 이상하고 신호 체계도 엉망인 구역이라 주차 자리를 찾다가 진을 뺐다. 중간에 어떤 사람들이 뜬금없는 데서 우르르 나와 차 주변을 둘러싸고 걸어가는데 눈빛이 텅 비어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성이라 조금 무서웠다. 푸주를 욕심 내서 두 접시나 시켰더니 나중에는 반 이상 남겼다.
2024.05.07.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하루종일 쉬지 않고 뭘 하긴 하는데 진도가 안 나간다. 별 성과도 없이 회사에 오래 남아 있었다.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전혀 못했다. 한국은 어버이날이 되었으므로 동생들과 곗돈 모은 것 중 일부를 엄마아빠에게 이체했다. 엄마아빠는 우리 셋보다 훨씬 부자인데... 난 어린이날(?)에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엄마아빠는 좋겠다. 그래도 평소에 미리미리 떼어둔 돈이 나가니 큰 부담은 없어서 좋다.
집에 가서 파운드케이크를 구웠는데 반죽에서부터 망한 느낌이 역력했다.
2024.05.08. 수요일
부다페스트, 비 오고 흐림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지. 파운드케이크가 꼭 무슨 떡 혹은 까눌레처럼 찐득하고 쫄깃한 식감이 되어 있었다. 우웩. 재료값은 그렇다 치고 저번 주에 먹은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다시 꼭 먹고 싶었는데 우유를 더 넣고 설탕을 덜 넣은 탓이다. 역시 베이킹은 주어진 값 그대로 하는 게 정석인가 보다. 파운드 케이크는 1:1:1이 절대 원칙이라 하니 다음엔 꼭 지켜야지. 다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저번 주 니스에서부터 뭔가 다 지쳐서 그냥 외면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이 심하게 든다. 이런 걸 두고 번아웃이라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 무 것 도 안 하는 상태가 번아웃인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로도 부족하게,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드는 그런 기분.
아무래도 거주증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 또 이 나라에 정 붙이고 언어 공부도 하며 살아보려 했던 내 의지가 꺾이면서 이러는 것 같다. 그래도 일은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고, 여전히 집에 가서도 뭔가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속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내가 까마득한 인턴이던 시절, 우리 팀 과장님은 늘 뭔가 피곤하고 지쳐있고 어린 나와 대화할 땐 다정하면서도 응 그렇구나.. 하며 영혼 없이 귀찮은 기색을 보이다가도 회식은 꼬박꼬박 잘 참석하고 술도 잘 드시고, 사적인 자리에서 말이 적고, 주어진 일은 다 해내고, PPT도 잘 만들고 엑셀 함수도 멋있는 거(?) 쓰고, 메일 문장도 매끄럽고, 나서는 걸 싫어하면서도 회의 시간에 어쩌다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면 지친 목소리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맞는 말만 하는 모습, 전부 다 멋있었는데... 과장님 잘 지내시나요..? 지금은 부장쯤 가셨는지요.. 지금 나는 전혀 멋있지 않지만, 딱 하나, 피곤한 과장임은 분명하다.
점심에 부사장님이랑 마마스에서 밥을 먹었다. 순한 집밥 같은 밥을 먹으니 든든했다. 근처 카페에 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힙하고 주인아저씨가 특이하시고 커피도 맛있어서 다음 만남 코스는 마마스->힙한 카페 또 이렇게 하기로 했다. 거주증 얘기를 내가 먼저 꺼내놓고 또 마음이 울적해졌다. 와인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히 받았다.
오후 내내 거주증 때문에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고, 내가 여기서 왜 이렇게 마음 고생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이럴 때는 to-do list가 도움이 된다. 월말 마감 리스트를 켜놓고 하나씩 퀘스트 깨듯이 깼다. 7시까지 일을 하고 몇 분 정도.. 마음으로 방황하다가 myACCA를 켜서 MA 과목을 공부했다. 생각이 비워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공부하다 보면 내가 너무 돌머리 같지만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에 마음이 놓인다. 100개 중에 90개를 까먹어도 10개가 남으니 이렇게 안전한 투자가 어딨을까. 볼 게 너무 많아 10시 30분에 회사에서 나왔다.
하루하루 허투루 보내지 않고 선하게 살면 언젠간 어떻게든 보상이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믿고 싶다.
2024.05.09.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날씨가 선선해서 왕푸에 훠궈를 먹으러 갔다. 푸주를 잔뜩 먹었다.
2024.05.10.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점심에 중국음식점에서 신입이 포춘 쿠키를 사주었다. 메시지가 의미심장하다.
저녁에 예약해 둔 메리어트 바에 갔다. 간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었는데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친구랑 슬렁슬렁 메리어트나 갈까? 하면서 출입하던 곳이 관문도 많아지고, 메뉴도 전부 바뀌어서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안 갈 것 같다.
Penfolds 쉬라즈를 먹었는데 맛있었다. 역시 무난하고 유명하게 팔리는 레이블은 다 이유가 있다.
나눔으로 2차를 갔다. 사장님한테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많이 여쭤보았다. 집에 오니 새벽 한 시가 넘어있었다.
2024.05.11.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전날 너무 늦게 들어와서 12시 예약한 세차 시간에 맞춰 가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세차를 맡겨놓고 두 시간이나 웨스트엔드를 방황해야 했다. 옷 가게는 들어가 보기도 기빨리고 한인마트까지 걸어갔다 오자니 햇빛이 무섭고.. 결국 그냥 대충 사람 적은 카페에 앉아서 가계부 정리를 했다. 생각보다(?) 안 써서... 조금 안심했다. 주식 거래와 블로그는 꾸준히 한지 6개월이 넘어가며 하루하루 습관이 되었는데, 가계부는 왜 이렇게 안 써지는지 모르겠다. 정말 매일 써야지 이젠. 차는 깨끗해져 있었다.
요즘 훠궈에 미쳤는지 자꾸 생각이 나서 결국 왕푸에 또 갔다. 이번 주만 세 번이나 훠궈를 먹은 것이다. 먹고싶은 걸로만 잔뜩 골라놓고 아이스크림도 잊지 않았다. 집에 오니 얼그레이 파운드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결국 만들었다. 이번엔 성공했는데 케이크 틀을 회사에 두고 와서 할 수 없이 동그란 케이크틀에 만들었다.
2024.05.12. 일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ACCA MA 시험을 보려고 한 날이다.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이건 공부 안 하고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다다음주로 미루었다. 어제 조금이라도 했으면 나았으려나. 낮 2시까지 잤다. 스스로 한심하게 생각이 돼서 계속 마음이 불편하더니만 결국 새벽에 우울한 영화를 보며 울었다. 운동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고 일은 일대로 밀려있고..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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