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101 (20250324-20250330) 본문
2025.03.24. 월요일
부다페스트, 비
어쩌다 보니 한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했다. 대사관에 가서 살벌하게 핸드폰, 애플워치 뺏기고, 대기석까지 정해주는 숨 막히는 분위기. 얼마나 걸리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하루도 안 되어서 비자가 나왔다.
회사 얘기는 여기 적고 싶지도 않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뿐이다.
집주인이 오는 날이라 스크래치 난 부분에 미니 페인트를 칠하는데 어.. 색깔이 안 맞아서 당황했다. 집주인이 다른 건 몰라도 벽에 몹시 예민한 것 같아 더 걱정이다.
독일어 인강을 틀어놓고 10분도 안 돼서 잠들었다. 어쩌려고 이러는지.
2025.03.25. 화요일
부다페스트, 안개 후 맑음
전화가 와서 새벽에 두어 번 일어났다. 비몽사몽 중에도 그렇게 좋고, 반갑고, 기특한 피아노 연주가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 나도 독일 가면 피아노를 다시 치러 다니고 싶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나한테 하루하루 이런 행복이 가당키나 할까. 내가 감히 이렇게 좋은 일을, 살아온 길이 경이롭게까지 느껴지는 사람과 그 인생을 가까이해도 될까. 수시로 올라오는 불안이 나를 잠식하려 하고 생전 처음 남에게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지만 이마저도 좋다. 들뜨고 행복한 이런 감정과 순간들을 경솔하게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 기록하다 보면 나중에 읽고 부끄럽거나 마음 아플 것이 걱정되면서도, 그저 지금과 내일에 집중하고 싶다.
점심 먹고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아왔다. 스티커로 여권에 붙여주었는데, National D Visa. 절차를 잘 모르겠어서 복잡한 와중에 회사 일은 너무 많다.

퇴근 후 통화하면서 거의 두 시간을 걸었다. 선선한 날씨와 예쁜 노을과 평온한 대화.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해야지. 이 풍경을 보자마자 금전적 고민은 다 날려보내고 여기 살기로 정했었다. 회사 때문에 덩달아 오만정이 떨어지는 상황이지만, 이 동네만큼은 떠나기가 싫다.
운동을 40분 정도 하고, 한 시간 목욕하면서 독일어 강의를 두 개 들었다. 독일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막막하다. 밤에 통화할 때도 비몽사몽 제정신이 아니었다.
2025.03.26. 수요일
부다페스트, 흐리다 맑음
새벽에 전화를 받고 놀라서 잠이 다 깼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안타까워서 나도 그저 같이 울어 주었다. 출근 전에 20분 남짓 쪽잠을 잤고 불안하게 일어났다. 하루 사이 살이 1키로 더 빠졌다. 출근하면서 통화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비자에 대해서는 확실해졌고, 후배가 봐뒀다는 임시 숙소로 쓸만한 오피스텔 같은.. 곳에 연락을 했다. 안멜둥이 가능하다고 하여 일단 이쪽으로 갈까 싶다. 그다음엔 짐을 어떻게 옮길지 생각해야 하고. 내일은 지금 집 페인트칠 견적을 받으러 직장 동료와 함께 집에 가보기로 했다.
점심에 행복식당에 갔고 그냥 꾸역꾸역 먹었다.
독일에는 가구가 갖춰진 렌트가 많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역시.. 생활지능이 몹시 낮은 편.... 독일어 공부할 때가 아니고, 어쩌면 한국 가는 것도, 안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이제 슬슬 현실로 닥쳐온다. 한 달만 지나도 이런 고민들이 다 지난 일로 느껴지겠지.
저녁에 사무실에 오랜만에 남아 야근을 했다. 통화하다가 상대의 잘난 부분을 또 알게 되고, 그것 때문에 내 모습이 더 초라해졌다.
열등감이란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가. 살면서 드물게 혹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무경력자처럼 헤맨다. 결국 예전 이야기를 와다다 꺼내놓았고, 쏟아놓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진짜 최악. 다른 생각 드는 게 싫어 일에 집중하다 나왔을 때는 비가 그쳐있었다.
한 시간 정도 목욕을 하면서 아무것도 안 했다. 음악은 틀어놨지만 듣지 않고 핸드폰도 안 봤다. 그냥 멍하니 천장만 봤다. 나는 언제쯤 쓸만하고 괜찮은 인간이 될까 생각했다. 진을 다 빼서 그런지 몸이 너무 안 좋아 깜빡 잠들었다. 처음으로 전화가 세 번 연달아 오는데 깨질 못했다가 다행히 일어났다.
2025.03.27.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에 잠깐씩 자면서 꿈을 여러 편 꾸었다. 비 내린 웅덩이에 피가 고인 꿈.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 손목을 붙들리는 꿈.

원래 굿모닝 인사를 책임져주던 애플워치에겐 미안하지만 요즘엔 좋아하는 목소리로 아침을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
점심에 페인터가 집에 와서 벽 페인트칠 견적을 내주고 갔다. 10만 포린트. 쓸만한 금액이라고 생각한다. 소개해준 현지인 동료에게 고마워 밥을 사고, 회사에서 내가 관두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직원이 있다면 네가 잘 말해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나는 그저 이직하는 것뿐이라고.

스타벅스에서 마차라떼와 커피를 사서 팀원들과 함께 먹었다.

저녁에 직원들을 초대해 집에서 놀았다.
낮에 선물을 하니 마니 하던 일로 서운함이 쌓여 결국 폭발했다. 술보다는 잠에 취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난 진짜 최악이다.
2025.03.28.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아름답게 널 안을 수 있게.
2025.03.29. 토요일
부다페스트, 비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가 꾸벅꾸벅 졸고.. 늦잠을 잤다.




그레이트 마켓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었지 싶은 시장 구경. 다른 나라 마그넷은 심혈을 기울여 예쁜 것을 샀으나 뭔가 헝가리 마그넷을 사려니.. 제일 촌스럽고 제일 헝가리스러운, 그런 것을 사고 싶었다. 이게 지금껏 여기서 살았던 나의 장난스런 애정일까.

회사 동료들과 간 전시는 약간 트릭아트 같은 것.. 중간에 3D 멀미가 몹시 나서 마지막엔 기억도 거의 없다. 사진 찍는 것 질색하지만 그래도 재무팀 떠난다고 이렇게 모여준 건데, 영혼은 없을지언정 뒤로 빼진 않았다.



전시회 보고나서 간 콜빈 근처 코르테즈. 부리또 양이 많아서 반은 포장해왔다. 원래는 저녁으로 먹을까 했으나..
또 내 말실수 내 잘못으로 싸우고.. 입맛이 있을 턱이 없다. 난 인간이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주책맞고 눈치도 없고 자의식이 비대할까.
다른 나라로 발령나신 이사님이 헝가리에 잠시 왔다며 집 앞에 들러서 와인을 주고 가셨다. 와인 생산국에 살다 보니 같은 유럽임에도 은근히 귀한 게 이웃나라 와인인데, 이탈리아 만두리아의 프리미티보 와인이라 감사히 받았다. 회사와의 이별은 전반적으로 매끄럽지 못해도, 생각지도 못한 인연과 잘 마무리되는 일도 있는 법인가 한다.
통화 끝에 그대로 잠들 뻔했으나 아… 비루한 몸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어, 겨우 일어나 근력 운동을 30분 했다. 이제 이 정도로는 힘도 안 드는 것 보니 강도를 올려야 할 것 같다. 좋아할 일인가.
자정 넘겨 한 시까지 목욕을 하며 미뤄두던 단편 하나를 겨우 읽었다. 땀을 흘려서인지 개운하게 잠들었다.
2025.03.30. 일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내일이면 3월 마지막날. 한국 가는 것만 기다렸는데 아무 정리 안 된 집을 보니 실감이 확 난다. 2.5년 야금야금 불려 온 살림…
팔 건 팔고, 버릴 건 버리고. 줄 건 주고. 이런 거 누가 대신 해주고 돈 받아가면 안 되려나. 많이 벌지도 쌓아놓지도 않은 주제에 툭하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천한 버릇이 어디서 들었을까. 그래도 요즘은 집안 꼴이 사람 사는 꼴 같기는 하게 스스로 잘하고 산다. 양말도 뒤집어 벗지 않고.
올해 나도 늦었지만 감사인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려… 내가 혼자 붙들고 밤새우고 어쩐다고 끝낼 일도 아니라 슬슬 불안해진다.
신입이랑 점심을 먹었다. 마사지를 받았다.
밤에 탈이 났고 속이 뒤집어져서 오래 고생했다. 차라리 몸이 아프면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그냥 갈리는 기분이다. 갈리고 갈리다보면 언젠간 무뎌질까. 이 시간이 언제 끝날까. 왜 4월은 이렇게도 먼가. 왜 내가 최선을 다한 일의 결과는 늘 이러할까.
'일상, 삶 > 매일 비장하게 나라 구하는, 난중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중일기 103 (20250407-20250408) (0) | 2025.04.11 |
---|---|
난중일기 102 (20250331-20250406) (0) | 2025.04.08 |
난중일기 100 (20250317-20250323) (0) | 2025.03.25 |
난중일기 099 (20250310-20250316) (0) | 2025.03.17 |
난중일기 098 (20250303-20250309) (0) | 2025.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