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102 (20250331-20250406) 본문
2025.03.31.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갑자기 배가 정말 너무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아침에 화장실에서 눈앞이 아찔했는데. 불길하다 싶었는데 오후에 결국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나는 나 하나의 퇴사가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신입이 집에 따라와 같이 있어줬다. 쓰러졌단 얘기에 많이 우는 상대 때문에 속상했다. 그와중에 신기하게도 입맛이 간만에 돌아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2025.04.01. 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의사한테 전화가 왔다. 병가를 썼다. 넘어진 무릎에 피멍이 들었다.
아침에 페인터가 왔고 오후에 원격으로 인수인계를 했다. 어제 많이 먹었고 배탈난 게 불안해 단식했다. 중간에 정말 뭐라도 먹고 싶은 욕심이 났으나 잠깐이었다.
나는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게 나라고 생각한다. 발 뻗고 누우려는 자에게 더 뻗으라고 멍석 깔아주는 게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결국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서랍 정리를 했다. 옷이 정말 몇 벌 없었고. 또 그마저도 다 커져서 입을 것이 없다. 큰일이다.
또 나 때문에 늦게 자게 된 상대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는 왜 매사 적당히를, 자제를 모를까. 어지러워 불안했으나 목욕이 너무 하고 싶어 그냥 했다.
2025.04.02.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회사에 더는 기운 빼지 않으려 하지만, 이미 내가 떠나는 것 자체가 언짢은 상태에서는 뭐가 되지 않는다. 더는 눈물도 안 나는 것을 보며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날 걱정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신입이 점심에 갈비탕을 갖다 주고 갔다. 부사장님도 마지막으로 뵈었다. 결국 펑펑 울었는데.. 신입은 걱정되고 나는 걱정 하나도 안 된다는 말씀이 너무나 반어법이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생각했다.
저녁에 닭죽을 많이 해서 신입이랑 같이 먹었다.
하필 오늘, 상대에게 안 좋은 일이 있어 걱정되었고 한 시간 정도 연락이 안 됐을 때 너무 불안했다. 의존하지 않으려 해도 요즘 상대가 내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셈인데 나는 도대체 뭘 해줄 수 있나. 다행히 잘 풀려서 긴장을 놓으니 10시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2025.04.03.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졸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코까지 골았다고 한다. 아, 절대 안 들려주고 싶었는데 요즘 진짜 머리만 대면 잔다. 너무너무 너무 창피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춥더니 햇빛에 숨이 막힌다. 아침에 회사에 오자마자 무단(?) 병가 쓴 것에 대해 석고대죄를 했다. 회사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배가 아프고 헛구역질이 난다. 법인 하나 감사는 거의 다 된 것 같다.
점심시간에 머리 스캔을 하러 메디커버에 갔다. 예약을 미리 했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또 회사에서 날 찾는대서 초조해졌다. 씨티 결과는 다행히 정상.
저녁에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별일이 아닌데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한 내 감정을 다스리려 일찍 전화를 끊었다.
하늘이 오늘따라 기막히게 예쁜데 중고거래가 수월치 않아 조금 성가셨다. 갈비탕을 데워서 먹고 신입이 호떡 먹고 싶다해서 집에 오라고 했다. 속상해서 와인을 좀 마셨다. 회사가 끝까지 사람을 이렇게 개질리게 한다.
2025.04.04.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 일찍 통화하면서 화해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내가 요즘 예민해진 탓이다.
신입이 어제 선물해준 부다페스트 메트로 노선도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정신없어서 먹어야 할 약 시간도 놓치고, 아침에 잠깐 넋놓고 있던 것 빼곤 계속 일을 했다. 신입은 오늘 마지막 날인데 야근했다. 사람들과 인사하며 우는데 왜 우냐고 웃으라고 쿨한 척 말했지만 마음이 안 좋다. 살아남으려고 고작 사원급 하나 잘라야 하는 회사.
공개된 공간이다보니 정말 제한적으로 써왔으나 이건 역대급 직장내 괴롭힘이다. 그동안 내가 누리고 갖췄던 것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상계처리하고도 실망감은 나를 저 밑바닥까지 추락시킨다.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사람은 배신자가 되고, 온갖 망상으로 이런 저런 가설을 진짜처럼 갖다 붙인다. 한 명은 짤려서, 다른 한 명은 이 사태에 질려서 우연히 퇴사 시기가 겹친 우리 둘은 회사에선 오히려 가해자가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잘하고 노력한 것을 정말 모를까. 속이 훤히 보이는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연민도 동정도 생기지 않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 듯하다. 그동안 진심으로 따르고 좋아했기에 남은 미련도 없다.
부장님 의견으로 다같이 급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서둘러 돌아오는데 상대는 날 기다리다 결국 잠들었다. 컴컴한 사무실에 불을 켜고 앉으니 8시. 신입이 끝까지 열심히 쓰고 간 인수인계서. 금요일마다 인수인계서에 서명해서 보고하라는 바보짓. 공개처형과 다름없이 넣어진 끝없는 cc. 그렇게 나 가기 전에 끝내고 싶다 빌고 빌었는데 엑셀과 샘플링 하나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똥개 훈련 시키는 후진 감사인. 이 와중에 제일 별로인 건 이 시간에 또 여기 앉아있는 나. 이 모든 개판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시간을 또 버렸다. 내 탓을 해보려 해도 진짜 이젠 도무지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다. 숫자가 자꾸 틀어져서 욕이 나왔다. 그러나 내 실수는 내가 고치면 되는 거니까.
2025.04.05. 토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신입이 떠나는 날이다. 짤렸다는 둥 온갖 농담을 해봤지만 내가 이 회사 떠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사건이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 우리는 어차피 부산에서 다다음주에 만날 테니까.


신입이 떠나고 동네를 산책했다. 아마 이런 밝은 낮에는 마지막일 듯해서. 안녕. 나를 위협하고 위로하던 검고 푸른 두나 강도. 한 번만 친해지고 싶었던 동네 깡패 까마귀들도.


과장님네 부부와 소풍을 다녀왔다. 너무 잘해주셔서 고맙단 말로도 부족하다. 내가 처음에 벽을 두고 낯가렸던 시기가 조금 짧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25.04.06. 일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갑자기 겨울 날씨다. 하루종일 짐을 싸는둥 마는둥 했다. 쓸만한 것을 버리려니 지구한테 미안해서 중고거래로 헐값에 내놓았으나 스트레스만 받았다.
아슬아슬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짐작한 일이기는 해도 덜 아플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존경한 크기에 비례해 실망도 그 정도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는 또 내 탓을 한다.
확실히 예민해지긴 했는지, 아니면 그냥 설움이 쌓일대로 쌓였는지 베개가 다 젖게 울었다. 어차피 모레면 버릴 베개라고 맘껏 우는 내 자신이 좀 우습기도 했다. 결국엔 칼로 물 베는 수준의 싸움인데 왜 이렇게 많이 서러울까.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 듯하다. 싸움 끝에 남는 것은 또 따뜻한 공감과 대화이다. 내가 얼마나 높은 수준까지 사랑할 수 있는지를 하늘이 시험하는 듯하다. 내가 합격할 자신이 확실히 있어 싫어하지 않는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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