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폴란드항공 비즈니스 부다페스트행 보잉787-8 탑승기 본문
"돈 내고 편한 건 최대한 늦게 해, OO 씨."
거의 십 년 전, 인턴 시절 나의 팀 차장님이 해 주신 말씀이다. 이외에도 차장님발 여러 명언이 있는데 난 이걸 최고로 친다. 돈 내고 편한 건 늦게 해야지 다운그레이드 하려면 힘들다. 돈도 내 봤고, 마일리지도 써 봤다. 한 번 편한 거 맛보니까 고생이 더 무섭다.
회사에서 이코노미 항공권을 보내 줬다. LOT가 뭐야? 했는데 부다페스트 직항이 폴란드항공밖에 없단다. 폴란드항공 예약페이지에서 최소금액으로 비즈니스 클래스 비딩을 했다. 80만원대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였다. 최소 금액 비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비장하게 다짐했다. 이번엔 꼭 이코노미 타리라. 그 다짐은 카운터 수속 줄을 보고 와장창창 무너졌다. 새벽 다섯시 반이었는데 거의 한시간을 기다려 도착한 체크인 카운터에 업그레이드 비용을 물었다. 89만원이랜다. 90 넘으면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 무슨 장난인지?
폴란드항공은 스타얼라이언스로 인천공항 라운지로는 아시아나라운지를 공동 사용하고 있다. 수속하면서 시간이 엄청 지체되었기 때문에 들어갔다가 10분만에 나왔다. 저번 몽골여행 때는 PP카드 잃어버려서 라운지를 못 가고, 이번엔 시간이 없어서 누리지도 못하고. 기내식이 있으니 미련없이 나왔지만 지금 유럽에 있는 신세로 사진을 보니 참 저 만두... 더 먹을걸 싶다.
비즈니스도 싸고 야무지게 발권 잘하시는 고수분들처럼 나는 기종을 다 외우고 다니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제일 중요한 '누워서 가기' 하나만 확인했다. 저게 비즈니스라고? 싶은 좌석을 스쳐지나가며 몇 번 봤기 때문에. 2022년 9월 기준 폴란드항공의 LO2002 인천-부다페스트행 비행기 기종은 보잉 787-8으로 비즈니스 좌석은 플랫베드를 제공한다.
나는 맨 앞좌석을 배정 받았고, 2-2-2 배열이라 혼자 가지는 못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리를 쭉 뻗어도 남는 공간이 주어진다.
웰컴 드링크와 간단한 간식거리가 제공되었는데, 이거 먹고 좌석 이리저리 굴려(?)보느라 늦게 출발하는지도 몰랐다. 저 빵 위에 올라간 건 뭔고 하니 관자였다. 폴란드항공 기내식이 아주 엉망진창이라는 말을 들어서 조마조마하며 씹어봤는데 그냥 평범한 맛이었다.
와인리스트도 그냥 평범. 나중에 나도 보고 참고하려고 찍어보았다. 이륙 후 첫 식사는 메인코스를 고르게 되어있었는데 나는 소고기와 파스타를 골랐다.
언제 또 우리나라 땅을 밟아볼지. 괜히 아련한 눈빛으로 공항도 한 번 봐주고.
한번쯤은 나도 지인들이 보는 sns에 자랑하고 싶은 비즈니스(=89만원...) 샷도 찍어보고. 어디다 어떻게 올려야 쿨해보일까 상상하다 이내 접는다. 어떻게든 안 쿨할 게 뻔하니까.
너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해졌던 간식. 옥수수를 튀긴 것인데 초등학생 시절 방과후 사먹던 밭두렁(논두렁?) 맛이 난다. 요즘 리뉴얼되어 나온 것은 단 맛이 첨가되어 싫었는데 이건 비록 유전자 조작 옥수수처럼 클 지언정 짭짤한 맛만 나서 아주 좋았다.
메인코스 전에 나온 애피타이저. 차가운 고기 안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혹시 소고기 파스타의 소고기가 이건 아니겠지 또 떨리는 마음으로 한 점 한 점.
알덴테 아니면 죽음을 달라. 칼국수도 생밀가루 맛 겨우 가신 수준으로 설익혀 먹는 나는 이 파스타가 정말 맛있었다. 먹는 사람 따라서는 덜 익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소고기는 약간 불고기스러웠는데, 묘하게 서양 맛이 났다. 의외로 이게 자꾸 생각이 나서 헝가리 와서도 계속 파스타만 찾아다녔다.
한식을 주문하진 않았지만 고추장은 그냥 준다. 저거 챙겨올걸. 왜 쿨하게 버렸니.
다 먹은 뒤엔 후식을 여러개 고를 수 있는데, 케익도 먹고 싶고 치즈도 먹고 싶었지만 나는 생긴대로 논다는 소릴 듣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치즈만 주문했다. 유리잔에 담긴 것은 아이리쉬 크림인데 친절한 폴란드인 승무원이 추천해준 디저트 리큐르다. 굉장히 독하고, 달고, 맛있었다.
자다가 깨면 하늘 색이 수시로 바뀌었다. 인천공항 호텔에서 잘 때까지도 실감이 안 났는데, 이 하늘을 보니 얼마나 멀리 왔는지, 또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해외취업)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해외취업이 내 평생의 꿈이었는데 막상 이루고 보니 이게 그냥 이런 기분이었나 싶고.
착륙 전 식사는 조식으로 조금 단촐하다. 헝가리 도착하자마자 일정이 매우 꽉 차있을 예정이었던 나는 일부러 헝가리 시간에 맞추어 시차적응을 했기 때문에 정말 아침 먹는 기분이었다. 자다 일어나면 입맛이 없기도 하고, 저 치킨 요리는 그저 그랬다. 반 정도 먹고 돌려보냈다. 이때부터는 술 마시는 것도 멈추었다. 도착하면 나의 상사분을 만나야 했기에.
옆자리 분이 수면제에 완전히 취해서 날 걱정시킨 것 빼고는 대체로 편안한 비행이었고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비즈니스 몇 번 타 본 적은 없지만, 타 FSC 항공사에 비해 아쉬운 점은 없었다.
89만원이면 1분에 얼마씩 까먹고 있는 거야? 하고 조금 아까워 했던 내 마음은 부다페스트 도착하자마자 몰아치는 일정에 싹 가셨다. 비즈니스 안 탔으면 나는 여지껏 산송장이었을 것이다. 내년쯤 한국에 잠시 휴가갈 때까지 체력도 키우고, 몸집도 줄여서(?) 산뜻한 상태로 이코노미 장거리 비행에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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