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114 (20250630-20250706) 본문
2025.06.30. 월요일
에쉬본, 맑음
새벽 두 시, 세 시, 다섯 시 이렇게 세 번을 깨고 여덟 시에 일어났다. 스팸인 줄 알면서 혹시나 하고 070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다. 하나는 분양 광고, 하나는 쿠팡 리뷰 알바 광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진정이 잘 안 됐다.
마감이 코앞이라 또 마음이 무겁다. 아프리카 출장 잡혔던 게 미뤄졌다. 이렇게 더워서야 정말 안 될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숨 막히는 급 미팅 한 시간 반, 이후 정신 차리느라 30분. 그 두 시간만큼 야근하다가 집에 늦게 갔다.
2025.07.01. 화요일
에쉬본, 맑음
사무실이 너무 덥다. 혼절할 것 같다.
간단히 야근 후 회식 갔다가 옆팀 인턴들까지 마주쳐 여러 이야기를 했다. 나이도, 창창한 미래도, 좋은 대학도 다 좋겠지만, 때묻지 않은 싱그러움과 어디서나 긴장한 티가 역력히 나는 서툶이 부러웠다. 성가시고 가끔 얄밉게 느껴지곤 했던 20대 초중반이 이젠 그저 애들처럼 예뻐보이는 걸 보니 나도 그만큼 나이가 든 것이다. 젊은이들끼리 놀으라고 자리를 비켜주고, 에스반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2025.07.02. 수요일
에쉬본, 맑음
아침에 샤워커튼봉이 떨어졌다. 에스반이 오니마니 희망고문하다가 취소돼서 이 땡볕에 걸어갔다.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안 풀리는 날이 있다.
오늘만 버티면 마감도, 더위도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오후에 정말 많이 짜증낼 뻔했는데 참았다. 저녁으로 컵라면 하나 먹는 것도 나 때문에 늦어지는 게 눈치가 보였다. 나는 아직 이해도 못한 주제에 오만군데 다 관련돼서 승인하는 입장이다.
차라리 일이 힘들어서 다행이긴 하다. 회사가 피곤하니 집에 가서 잠드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다. 퇴근길에 날아갈 것 같이 바람이 불고 저멀리 하늘에 벼락 치는 게 보였다. 드디어 더위가 꺾이는구나.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 혼자 팔짱을 끼고 걸었다. 정말로 무서웠다.
월 마감 작업 중에 검증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그걸 잠들 때까지 생각했다.
2025.07.03. 목요일
에쉬본, 흐림
5시, 그리고 7시에 깨서 어제 해결 못한 수수께끼를 계속 메모장에 그려보았다. 재미로 하는 퍼즐같았으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저번 달에 내가 만든 검증 공식을 내가 이해 못해서 머리가 나쁜 거 같다고 자책했는데, 동료가 놀라면서 "왜 니가 바보야? 우리 팀에 와서 얼마나 좋은데." 라고 한 게 생각났다. 그 힘으로 일어났다.
어젠 그렇게 덥더니 이젠 쌀쌀하다.

집에 오는 길. 노랗고 작은 자두같은 것이 호르토바지에서 먹어본 열매 같아서 이안에게 물어보니 맞는 것 같다. 먹을 생각은 없지만 먹어도 되냐 하니 안 된댄다.
빨래를 해서 널었다.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
2025.07.04. 금요일
에쉬본, 맑음
아침부터 윈도우 계정이 잠겨서 호다닥 담당 직원에게 가져갔다. 본인 손이 매직핸드라며(..?ㅋㅋ) 레지스트리를 만져 정말 금방 해결해주고는, 지난번 먹은 막창 얘기를 하다가 화상 입은 손 얘기가 또 나왔다. 아직도요? 하고 놀라는데, 아마도 영원히 남을 자국인지도 모르겠다. 가진 외모 중에 그나마 봐줄만한 게 손인데 안타깝게 됐다.
일이 하나둘씩 나에게 밀려온다. 지금은 차라리 바쁜 게 반갑다.

점심에 한식당에 가서 백반을 먹고, 내가 제일 어른이라 커피를 샀다. 커피를 기다리다가 채용 고사하고 대신 후배를 추천한 회사분들을 마주쳤다. 면접을 화상으로만 봐서 실물은 처음인데, 멀쩡해 보였으려나 모르겠다.
집에 걸어서 왔다. 어제에 이어 빨래를 한 번 더 했다. 인도커리를 시켜먹었다. 밥이 같이 오는 줄 모르고 밥을 하고 말았다. 파스타 면을 튀겨서 안주 삼아 먹었다.
2025.07.05. 토요일
에쉬본, 맑음
아주 아주 오래 자다가 일어났다. 새벽에 두 번 일어났는데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했다.
설치한지 일주일만에 엉망이 되어가는 책상을 치우고, 날이 맑으니 침대 커버를 세탁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좀 더 누워있고. 이제는 주말이 정말 너무 좋다. 생각해보니.. 이게 당연한 건데. 직장인에게 주말이 싫은 존재가 되는 건 얼마나 가혹한 일이었는지.



드디어 TV장을 조립했다. 의외로 책상보다 가볍고 쉬웠다. 책상은 뒤집어놓고 조립하다가 힘을 써서 다시 뒤집어야 한다면 (아직도 발목과 허벅지가 아프다) 티비장은 아래부터 착착 쌓아 올리는 것이라 허리에 무리가 없었다. 설명서에는 둘이 하라고 되어있었지만 혼자 어떻게든 하는 요령을 터득해간다. 후배한테 자랑했더니 이제 둘이서 가구 조립 출장을 다니잔다. 여전히 가시손이지만 가혹한 독일 환경 덕에 나름 큰 발전이 있다.
전자렌지 배송이 와서 낑낑거리며 올려놓고 돌아섰는데 또 누가 벨을 눌러서 보니 윗집 청년이, 열쇠없이 나갔다가 문이 잠겼다고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정말 연신 죄송해하면서 와인 한 병을 사다드리고 싶다길래 괜찮다고 하였다.

티비까지 올려놓고 나니 이제 진짜 거실처럼 보이고 드디어 집도 좀 치우고 싶어져서 로봇청소기를 돌렸다. 이제 진짜 공사장 아니고 집같다. 속이 다 시원하다. 내친 김에 일주일 쓴 침구류도 갈았다. 바삭바삭하게 마른 촉감이 너무 좋다.
마트에 가서 천도복숭아, 요거트를 사고, 사고 싶은 게 또 생겨서 10분만에 다시 나갔다. 마음이 물러지니까 당분간 음악은 안 듣기로 했는데 밖이라 그런지 괜찮았다. 사실 사고 싶은 건 아몬드였는데 주제에 6유로나 해서... 기왕 더 맛있는 피스타치오로 사고, 야쿠르트가 있길래 반가워서 사왔다. 한국 있을 땐 딱히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야쿠르트를 냉동고에 넣어 얼렸다가 목욕 후에 먹었다. 목욕탕 생각이 났다.... 한국 목욕탕.
2025.07.06. 일요일
에쉬본, 흐리고 비
새벽에 추워서 깼다. 얼마 전엔 40도 가깝게 올라가더니 이틀만에 춥다. 그야말로 미친 엑스가 널을 뛰는 날씨다. 일상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그냥 게임 퀘스트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자유도가 아주 높고 몰입이 잘 되는 게임을 하는 거라고. 자칫 나쁜 비유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일단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잠이 다 깨서 정돈된 거실을 보니, 그동안 도대체 그 공사판 한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침에 로봇청소기 한 번 더 돌려놓고 집 근처 커피 맛집에 다녀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다는 한국인 리뷰를 보고 나도 시켜보았는데, 1분도 안 돼서 얼음이 다 녹아버려 그냥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다음엔 원래대로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마셔야지. 여기 원두가 너무 고소하게 맛있는데다 직접 볶은 원두를 팔기도 해서 드립커피 머신을 살까 생각하고 있다. 아마존에 200유로 넘는 뭐가 또 눈에 들어와서.. 일단 닫았다.
어제 벗겨낸 시트 세탁을 오늘 하려고 했으나 점심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구름처럼 보이진 않아 그냥 세탁하고 밖에 널어보려 했는데 하마터면 짜증나는 일 될 뻔했다. 내일은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한다. 소파가 오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서둘러 집 꾸미기를 마쳤는데 결과만 보면 잘한 게 맞다. 조명이 마지막 관문이다. 아직은 해가 길어서 불 켜고 살 필요가 없지만 이러다 눈 깜짝할 새 해가 짧아진다.
유튜브가 forgotten favorites 라며 오랜만에 예전에 듣던 노래들이 나왔다. 작년 그리스 해변에서 깜빡 잠들어 세 시간 동안 한곡 반복으로 듣던 노래가 나왔다. 정말 달게도 잘 잤었는데. 겁도 없고 걱정도 없이. 언덕 위 딸랑 있던 컨테이너 집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해먹에 밤하늘을 보고 누워, 한국에서 일출을 보고 있다는 부장님과 통화를 했었다. 지난 4월 한국에 갔을 때, "너는 사람을 너무 믿고 너무 잘 당해. 그리고 굴하지도 않고 또 믿어. 그게 대단해. 대단은 한데, 좀 덜 믿어라. 세상은 좀 덜 믿어도 되는 곳이야. 알았니?" 하시는데 당시 내 상황을 모르고도 하시는 말이라 놀랍고, 내가 매사에 그렇게 투명하단 말인가, 하고 창피하면서도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살수록 세상을 덜 믿는가. 여전히 믿는가. 솔직히 내 바람은, 덜 믿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을 더는 잃고 싶지 않다.
2022년 블로그 첫글부터 다시 읽어보고 있다. 이런저런 농담이 많았던 초반 2개월, 이후 회사와 여러 상황에 시달려 급속도로 우울해지는 문체, 그와중에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와 여행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어보려 했던 노력들. 그땐 그저 여행에 미친 줄만 알았지 힘들어서 그러는 줄은 몰랐다. 3년 뒤 나는 어디서 무슨 생각으로 이 일기를 읽게 될까. 예전엔 여행이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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