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난중일기 096 (20250217-20250223) 본문
2025.02.17. 월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겨울이 이렇게까지 길었나 싶다가, 온실같은 내 방에 앉아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 벌써 두렵다. 어제 잠 못 이루며 그동안 여기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봤다. 소설이라고 해도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는 일들. 시트콤도 이렇게는 안 쓸 것 같은 일들. 헝가리 와서 만난 생전 듣도보도 못한 부류의 이상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너무나 이상할 나.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들. 나는 이제 정말 지쳤다.
동생은 이직을 준비중이라 단톡방에 서류 합격 소식을 종종 알려오는데 그 빈도수가 꽤나 높다. 젊으니까. 부럽다고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누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끝났는데' 라고 했더니, '끝나긴 뭘 끝나 왜 그런 생각을 해' 라고 정색하고 답변이 돌아와서 찡해져 울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 초등학생이던 네가 내 패배주의적인 말에 언제 이렇게 단호하고 똑부러지게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잘 컸을까. 나는 왜 포장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주변에 해서 걱정시킬까. 나는 왜 항상 사람이 이렇게... 투명할까.
회사에서 또... 절망케하는 질문들을 받고 모든 희망을 잃었다. 나는 가끔씩 의자에서 내 몸 하나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집에 걸어가는 길에 헛구역질이 몇 번이나 나와서 멈춰서야 했다. 몸살은 아니지만 테라플루 나이트타임을 먹고 일찍 누웠다. 오늘은 정말 울 힘조차 없다.
2025.02.18. 화요일
부다페스트, 흐림
새벽 두 시에 일어났다. 회사 일, 건강 악화, 그리고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냥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만 드는 게 아니라 누워 있어도 맥박이 90, 100 이렇다. 공황장애가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될 정도로.
아침에 편한 사람들이랑 웃고 떠들고 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다가. 그래 뭐 아무렴 어때, 하다가.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고. 친구들이랑 아무렇지 않은 척 카톡으로 농담이나 하다가.. 그러다 이젠 아주 사소한 메일만 봐도, 누가 내 방에 찾아와 아주 사소한 질문을 해도, 창문에 누가 비치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려서 정말 끝이지 싶다. 원래도 멘탈이 약했지만 이렇게까지 약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내가 얼마나 잘 버텨왔는데.. 이젠 쓰임을 다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2025.02.19. 수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잠을 며칠째 하루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다. 정신이 멍하다. 중요한 미팅이 있었는데 다행히 한 시간 내내 정신줄은 잘 잡고 있었다. 끝나고 허무해지고 조금 울었다.
생리 주기 일정한 것과 생리통 없는 것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이젠 그마저도 무너진다. 하혈인지 정말 생리가 맞는지 애매해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른 과는 몰라도 여기서 산부인과는 기억이 좋지 않고 정말 가고 싶지 않다.
아리랑에서 어린 직원들을 데리고 가 삼겹살, 파전, 냉면을 먹었다. 예전만큼 절대 많이 먹어지지가 않는다. 통화를 하다가 새벽 한 시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2025.02.20. 목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아침부터 일어나기가 힘들더니 몸살 기운이 오전에 세게 왔다. 혈압은 다행히 정상이 나왔다. 그런데 세제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해서 자꾸 헛구역질이 난다. 주말에 신입이랑 어디라도 놀러가자고 하는데 기운이 얼른 나서 꼭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굶고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억지로 두부를 먹었다. 쌀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참았다. 테라플루를 마시고 일찍 잤다.
2025.02.21. 금요일
부다페스트, 맑음
사소한 일로도 회사에 화가 난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며 마음을 달랬다. 옆팀에서 도넛을 갖다 주었는데 하도 맛있어 보여서 조금 먹었다. 내일 노이지글러 호수 근처로 여행을 간다.
2025.02.22-23 여행기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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