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113 (20250623-20250629)
2025.06.23. 월요일
에쉬본, 맑음
새벽에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놀라 깼다. 바람에 다른 방 문이 닫힌 거겠지 했는데 나가서 확인해볼 용기도 안 났다.
잠을 몹시 설쳐서인가, 머리 쓰는 업무를 조금도 손 못댔다. 점심에 어쩌다가 조장님이랑 단둘이 밥을 먹게 됐는데, 좋아하고 따르는 마음이랑 별개로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오후에 입사 하루 차이로 성과 평가 대상자가 됐음을 알았다.

저번주 내내 구천을 떠돌던 dhl 택배가 어떻게 내가 있는 데를 알고 회사 앞 알디 dhl packstation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 집에서 여기가 얼마나 먼데.
알디까지 걸어간 김에 기대없이 신호등 꺼진 횡단보도에 가보았는데…

드디어 고쳐졌다. 역시 모든 소원(?)은 잊고 있을 때쯤 이뤄진다.
몹시 피곤하고 입맛이 없어서 집에 일찍 왔다. 불닭볶음면 먹고 더 피곤해졌다. 모기 소리를 못 들었는데 모기 물린 자국이 생겨 무서웠다. 생각해보니 이어플러그 하고 있었으면서.. 바보인가.
2025.06.24. 화요일
에쉬본, 맑음
새벽에 스팸 전화에 깼다. 한 번 스팸 전화에 낚인 정신은 다신 속지 않아서(?) 알람이 두 시간째 손목을 울려도 깨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뭔놈의 일이 좀 마치려 하면 오고 또 오고 해서 이젠 휴가갔던 팀원이 돌아와 여행 경비 업무 놓으려 하니 아쉬울 지경이다. 헝가리 부가세를 보다가 진짜 트라우마 도져서 표정이 급 안 좋아졌다. 팀원이 나보고 괜찮냐고 하는데 내 투명함이 부끄럽다.
점심 먹고 회사 근처를 산책했다. 수풀에 가려져 있던 곳이 알고 보니 어느 집의 정원이었다. 선선하고 하늘은 맑고. 여기까지 오느라 내가 뭘 어떻게 했던가. 가지고 있던 모든 슬픔이 갑자기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 얼마나 갈지 몰라도.
집에 와서 식기세척기가… 소금 뚜껑이 열려 여기저기 부식 된 것을 보고 (내 쯔빌링 칼….) 해도 해도 안 되는 분야가 누구에게나 있음을 인정하고. 기분 전환하러 밖에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밀밭까지 걸어갔다가 연못까지 더 걸어갔다.
2025.06.25. 수요일
에쉬본, 흐림
아무 것도 쓰고 싶지 않다.
2025.06.26. 목요일
에쉬본, 맑음
정처없이 동네를 떠돌다가 길에서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고, 닭갈비를 해준다 해서 거절하지 않았다. 최근 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한심해 보이더라도 이젠 가까운 주변에 내 상태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일찍 잤다.
2025.06.27. 금요일
에쉬본, 맑음
회사에서 단순 업무를 할 때마다 악몽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일부러 어러운 일을 잡아봤지만 다 마치지 못했다. 다행히 올해 성과 평가에서 제외라는 소식만 기뻤다.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몇 시간동안 얘기했다. 쓴소리도 들었지만 듣고 싶어서 얘기 꺼낸 거니까. 진작 이렇게 할걸. 푹 잤다.
2025.06.28. 토요일
에쉬본, 맑음
아침에 이케아 가구, TV가 왔고 의자 조립하는데 한 세월이 걸렸다.

책상은 꼬박 세 시간이 걸렸고, 너무 무거워서 허리가 나가는 줄 알았다. 단순 작업이다 보니 별 생각이 또 다 들었지만 그냥 묵묵히 조립만 했다. TV장은 내일 해야지. REWE에 가서 장을 보고 초밥을 시켜 먹었다. 그래도 책상에 의자가 버젓이 들어간 방을 보니 이제 정말 안정되는 기분이다. 친구와 밤늦게까지 대화하다가 마음이 놓여서 그대로 잤다.
2025.06.29. 일요일
에쉬본, 맑음
TV장은 박스를 뜯지도 않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했다. 먹기만 하고, 컴퓨터만 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더운 날. 가끔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으나, 금방 괜찮아졌다. 공부든 운동이든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고 날 몰아붙이지 않아도 하나도 한심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은 이대로도 충분히 잘 버티고 있는 거니까. 기대하지 않았던 신호등이 갑자기 고쳐진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